남태우 기자 leo@busan.com | 2025-05-30 09:00:00
지난 1월 ‘미술관과 박물관’이라는 주제로 체코 프라하, 오스트리아 빈,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다녀온 데 이어 이번에는 ‘카페와 음악’을 주제로 오스트리아 빈을 1주일간 여행했다.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5대 작곡가인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루트비히 판 베토벤, 요한 슈트라우스 2세, 프란츠 슈베르트 등 빈의 음악가들과 그들과 관련 있는 카페 이야기를 3차례로 나눠 소개한다.
■모차르트하우스비엔나
잘츠부르크 출신인 모차르트는 스물다섯 살이던 1781년 빈으로 올라가 10년간 살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 동안 그는 빈의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거처했다. 많은 돈을 벌었지만 낭비벽이 심해 한 번도 자택을 소유한 적은 없었고 모두 셋집이었다.
여행의 출발지는 모차르트가 빈 생활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독일기사단궁전이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게 그가 잘츠부르크 대주교 콜로레도의 억압에 시달리다 쫓겨났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사실과 다른 점이 적지 않다.
당시 콜로레도는 계몽주의자였으며 낭비와 사치에 물들어 붕괴 직전인 도시를 되살리기 위해 근검절약과 근면성실, 교육발전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사회개혁을 외쳤다. 전임 대주교 슈라텐바흐의 특혜를 받으며 자유분방하게 살던 모차르트에게는 이 같은 개혁이 ‘몸에 맞지 않는 옷’ 같은 것이었다.
모차르트는 돈을 더 벌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잘츠부르크 궁정악단에서 나가야 했다. 그가 돈을 벌겠다면서 콜로레도 대주교에게 사직서를 낸 곳이 바로 독일기사단궁전이었다.
궁전에는 아무나 들어가서 간단히 둘러볼 수 있는데 중정을 둘러싼 건물 모습이 딱 숙소처럼 보인다. 과거에는 독일기사단 본부여서 관계자들이 숙소로 이용했고 지금은 호텔 겸 게스트하우스로 활용된다.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요금을 내면 숙박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또 이곳에서는 정기적으로 모차르트 등을 주제로 하는 연주회가 열린다.
잘츠부르크의 월급쟁이 악사 노릇을 그만둔 모차르트는 장모가 운영하던 밀히가세의 하숙집, 지금은 명품가게가 들어간 그라벤거리의 셋집 등 빈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살았다.
독일기사단궁전에서 나와 그라벤거리로 가면 파란 돔 지붕이 인상적이며 빈에서 가장 오래된 장크트페터교회가 나타난다. 교회 옆으로 돌아가면 그가 빈에서 처음 살았던 하숙집 건물이 나온다. 건물 벽에는 모차르트 이야기를 설명하는 명패가 붙었다.
마침 관광객용 마차 두 대가 하숙집 앞을 지나간다. 마부가 힐끔 건물을 쳐다보는 걸로 판단해 보건대 손님들에게 집의 내력을 설명해주는 모양이다.
하숙집에서 다시 그라벤거리로 나오면 명품 ‘토드’ 상점이 1층에 입점한 건물이 보인다. 모차르트가 빈에서 첫 히트작이었던 오페라 ‘후궁 탈출’을 작곡한 곳이 바로 여기였다. 이 작품의 성공 덕분에 그는 장모로부터 인정을 받아 콘스탄체와 결혼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모차르트는 여러 면에서 아버지 레오폴트와 닮았다는 사실이다. 레오폴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혼자 잘살겠다며 어머니의 눈물을 뒤로 한 채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의 가족을 버리고 잘츠부르크로 갔는데, 모차르트도 혼자 성공하겠다며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빈으로 간 것이었다. 또 레오폴트는 어머니의 허가도 얻지 않고 가족 중 누구도 참석하지 않은 상황에서 잘츠부르크대성당에서 결혼했는데 모차르트도 똑같이 아버지 승낙을 받지 않고 아버지, 누나가 불참한 가운데 슈테판대성당에서 결혼했다. 자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아들을 보는 레오폴트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모차르트는 슈테판대성당에서 결혼하고 음악가로 성공해 큰돈을 벌자 여러 집을 거친 뒤 독일기사단궁전 바로 앞 돔가세 5번지 고급주택으로 이사 가 방이 4개인 한 개 층을 통째로 빌려 살았다.
많은 사람이 가진 두 번째 오해는 그가 ‘평생 빈곤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1980년대 영화 ‘아마데우스’도 그런 스토리로 전개되는데 이것도 사실과 매우 큰 차이가 있다. 그는 연간 1000굴덴만 벌면 고소득자로 치부되던 당시에 10년간 연평균 1만 굴덴을 벌었다. 월세가 잘츠부르크에서 받던 연봉과 비슷할 정도로 비쌌던 돔가세 고급저택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돈벌이가 엄청난 덕분이었다. 그가 그런데도 말년에 쪼들렸던 것은 귀족에게 기죽기 싫어 사치를 부린 데다 당구 도박에 빠져 돈을 많이 잃은 게 이유였다. 여기에 알코올 중독자이기도 했다.
돔가세 저택은 모차르트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피가로의 결혼’이 작곡됐기 때문에 ‘피가로 하우스’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가 떵떵거리며 살던 곳은 지금은 ‘모차르트하우스비엔나(이하 모차르트하우스)’라는 박물관으로 바뀌어 많은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는 1개 층만 빌려 썼지만 박물관은 건물 전체에 걸쳐 조성됐다. 그가 쓰던 물건이나 악보 등 다양한 흔적을 살펴보면서 그의 음악에도 귀를 기울여보는 재미는 남다르다.
놀랍게도 모차르트하우스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 덕분(?)이었다.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나치는 정권을 장악한 민사당을 앞세워 모차르트 사망 150주년이었던 1941년 ‘제국 독일 모차르트 주간’ 행사를 열었다. ‘게르만 우월주의’를 과시하는 데에 음악 분야에서 모차르트만 한 인물은 없었다. 이 행사 때 모차르트하우스가 처음 대중에게 공개됐고 박물관으로 변하는 계기가 됐다.
■카페 프라우엔후버
모차르트는 낭비를 일삼아 재산을 탕진한 데다 인생 말년에 오스트리아-투르크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연주회가 사실상 중단되다시피 해 금전적으로 매우 쪼들렸다. 그의 궁핍한 마지막을 상징하는 공간이 모차르트하우스 인근에 있다. 바로 빈 중심가인 케른트너거리의 슈테플백화점 뒤편에 있는 ‘카페 프라우엔후버’다. 이곳은 원래 은퇴한 궁정 요리사가 운영하던 작은 식당이었는데 20세기 들어 카페로 바뀌었다.
모차르트는 한창 잘나갈 때에는 대형 공연장에서 귀족 수백 명을 모아놓고 연주회를 열어 한 번에 수백 굴덴을 버는 게 일상적이었지만 세상을 떠나기 수년 전부터는 한 푼에도 쩔쩔맸다. 그래서 이곳처럼 작은 식당에서도 연주회를 열곤 했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 연주회를 열었던 곳도 여기였다. 그가 연주한 곡은 피아노 협주곡 27번이었다. 그가 죽은 뒤 완성된 유작 ‘레퀴엠’이 초연된 곳도 여기였다. 카페 입구 벽에는 모차르트의 사연을 담은 명패가 붙어 있다.
카페 프라우엔후버의 사연을 아는 관광객들은 끊이지 않고 이곳을 찾아온다. 미국에서 온 두 부부는 테이블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모차르트의 흔적을 찾으려 애쓴다. 한 젊은이가 앉은 구석자리 벽감에는 모차르트 동상이 보인다. 피아노도 한 대 보이지만 그가 사용했던 것일 가능성은 1%도 없다. 삐걱 하며 문이 열리더니 일본 여성 관광객 10여 명이 들어온다. 일흔은 넘어 보이는 노직원은 그들을 보자마자 카페 가장 안쪽에 비워둔 자리로 데려간다. 일찌감치 예약한 손님들인 모양이다.
할아버지 같은 노직원이 웃으며 가져다준 메뉴판에서 발견한 ‘모차르트커피’를 주문한다. 빈 어디에서나 마실 수 있는 멜란지커피인데 이름만 모차르트라고 붙인 것이다. 그래도 그런 이름이 달린 커피를 마셨다는 게 어딘가.
아직 입안을 감도는 커피 맛을 느끼며 카페 프라우엔후버에서 나온다. 이제 모차르트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은 장소로 가야 한다.
카페 바로 앞은 슈테플백화점 뒷길이다. 관광객들이 백화점 벽 한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안내인의 설명에 귀를 기울인다. 저곳이 바로 모차르트가 ‘마술피리’는 물론 유작이나 마찬가지인 ‘레퀴엠’을 작곡한 건물이 있던 자리다. 그리고 과로와 스트레스로 병에 걸린 그가 서른다섯 살의 짧은 인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날 때 있던 건물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 백화점이 들어섰다. 백화점 측은 벽에 ‘모차르트가 눈을 감은 곳’이라는 안내판을 붙였는데 그걸 보러 매일 많은 사람이 찾아간다.
모차르트의 죽음과 관련해서 다시 사람들의 오해가 등장한다. 영화 ‘아마데우스’ 때문에 널리 퍼진 내용이기도 한데, 그가 ‘질투에 사로잡힌 라이벌 살리에리에 의해 독살됐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음악사학자들은 이런 주장을 전면 부인한다. 빈에서 존경받으며 부유하게 살던 살리에리가 친하게 지냈던 모차르트를 독살할 이유도 없고, 시신에서 독살 흔적도 없었다는 것이다.
모차르트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다. 갓난아기일 때 어머니에게서 모유를 먹지 못해 체력이 허약했던 데다 각종 병에 걸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긴 탓이었다. 그는 인생 말년에는 죽음에 관심을 많이 보였다. ‘오래 전부터 혀끝에서 죽음의 맛을 느꼈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장크트미하일러교회
슈테플백화점 자리에서 세상을 떠난 모차르트를 위해 잠시 고개를 숙이고 다시 슈테판대성당으로 간다. 그는 전염병에 걸려 죽은 것으로 오해를 받아 성당에서 정식 장례 미사를 치르지 못했다. 대신 슈테판대성당 바깥의 십자가 경당 앞에서 지인들이 모인 가운데 간단한 장례식만 거행할 수 있었다. 십자가 경당 안에는 그가 이곳에서 장례식을 치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명패가 붙어 있다.
모차르트의 유작 ‘레퀴엠’과 장례 미사 이야기가 생각난 김에 슈테판대성당에서 그라벤거리~콜마르크거리를 지나 호프부르크왕궁 쪽으로 향한다. 왕궁 앞에는 미하엘러플라츠광장이 있고 광장 구석에는 13세기에 만들어진 작은 성소 장크트미하일러교회가 보인다.
모차르트가 장례 미사를 치르지 못한 사실을 아쉬워 한 지인들은 추도 미사라도 열기로 했다. 그들이 고른 장소는 바로 이곳이었다. 교회가 자발적으로 미사를 개최한 것은 아니었고, ‘마술피리’를 초연한 공연기획자 슈카네더가 교회에 장소 대여비를 지불했다. 유작 ‘레퀴엠’이 완성된 뒤 초연된 것은 카페 프라우엔후버였지만 미완성 유작이 초연된 것은 이날 추도 미사 때였다. 교회 안쪽 벽에는 모차르트의 데스마스크와 추도 미사, 레퀴엠 초연 사실을 새긴 동판이 붙었다.
35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대작곡가의 불운을 안타까워하면서 잠시 휴식을 위해 오페라하우스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그곳 앞에는 빈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인 ‘카페 모차르트’가 있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고 3년 뒤인 1794년 문을 연 곳인데, 1869년 카페 바로 앞에 모차르트 동상이 세워지자 이름을 ‘카페 모차르트’로 바꿨다. 그 덕분에 오페라하우스 가수, 작곡가 등 음악인은 물론 빈의 내로라하는 예술인들이 대거 찾는 명소가 됐다.
모차르트가 간 곳은 아니었지만 그의 이름을 붙인 명소니 안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기에서도 모차르트커피를 주문하고 곁들여 모차르트토르테도 하나 시킨다. 맛이야 다른 커피, 토르테와 큰 차이가 없지만 이름 하나가 주는 의미는 적지 않다.
마침 옆자리에 대만 여성 둘이 앉아 음식을 먹는다. 그들은 상세한 내용은 모르고 모차르트라는 이름만 듣고 일부러 찾아온 모양이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재미있게 지내다 가면 되는 게 여행 아닌가.
음악여행을 온 김에 꽤 수준 높은 연주회를 감상할 기회를 기대했지만 여러 사정상 일정이 맞지 않는다. 고민하던 터에 오스트리아관광청 지원을 받아 저녁 8시 30분에 시작하는 쇤브룬궁전 오랑제리 콘서트에 가게 됐다. 그러지 않아도 오랑제리를 꼭 둘러보고 싶었다. 빈에서 요제프 2세 황제의 사랑을 받게 된 모차르트가 황실오케스트라 악장이던 살리에리와 ‘음악 대결’을 벌인 곳이 오랑제리였다.
쇤브룬궁전 콘서트 입장객은 3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번 음악여행에서도 절실히 느낀 것이지만 음악과 관련된 장소에는 일본인이 꽤 많다. 이곳에도 50여 명에 이르는 일본 단체관광객이 자리를 채워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한국인은 개별적으로 찾아온 서너 명에 불과했다.
둘러보는 수준이 아니라 연주를 들어본다는 기대가 적지 않았지만 솔직히 간이 연주회여서 수준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래도 다른 곳도 아니고, 모차르트가 직접 작곡한 오페라를 공연했던 오랑제리에서 음악을 들었다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 빈(오스트리아)=남태우 기자 le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