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창포원-너랑나랑 쉬엄쉬엄 꽃길만 걷자

봄꽃 꽤 시들었지만 곳곳에선 여전
청혼에 최고 장미꽃밭 ‘꽃길만 걷자’
꽃창포습지 정자 앉아 편히 쉬는데
수련원에 한두 송이씩 핀 연꽃 눈길
이달 말엔 모두 피어 절정 이룰 듯
온갖 화초 무성 자연주의정원 쉼터
낭만·환상적 분위기에 관람객 매료

남태우 기자 leo@busan.com 2025-06-13 09:00:00

경남 거창군 창포원은 언제 가도 좋다. 꽃이 온 정원에 만개했을 때도 좋고, 약간 시들었을 때도 좋다. 쉬면서 산책하면서 사진 찍기에 여기만 한 곳이 어디에 있으랴. 이전에는 꽃구경을 갔지만 이번에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푸른 경치를 보면서 그늘이 시원하게 드리운 정자에서 낮잠을 자며 휴식하는 ‘힐링 여행’을 다녀왔다.

경남 거창군 창포원 꽃창포습지의 정자에 한 여성이 앉아 휴식하고 있다. 남태우 기자 경남 거창군 창포원 꽃창포습지의 정자에 한 여성이 앉아 휴식하고 있다. 남태우 기자

■점심 한 끼의 위로

고속도로 곳곳에서 사고가 속출하고 공사도 이어지는 바람에 생각보다 늦게 거창에 도착해 일단 점심부터 먹기로 했다. 도시에서 벗어나 군 지역 여행을 할 때 늘 고민은 식사다. 어디를가나 거의 천편일률적이어서 지역 특성을 즐길 수 있는 메뉴를 찾는 게 쉽지 않다.

3년 전 거창에 처음 갔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역 농산물로 만든 비건 식당이 있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시골답지 않게 식당 내외부 장식은 물론 음식 수준도 최고급이었다. 미슐랭 별 1~2개 정도를 줘도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이번 여행도 황강을 내려다보는 비건 식당에서 맛있고 깔끔하고 상큼한 한 끼 식사로 시작했다. 차가 밀리는 바람에 짜증스러웠던 마음은 너그러워졌다. 여행에서 음식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지쳐서 짜증스러워진 심신을 달랠 수 있는 게 음식이다.

집에서 미리 내려온 스페셜티커피를 따른 잔을 옆에 놓고 식당 밖 그네에 잠시 앉는다. 그네가 앞뒤로 흔들릴 때마다 하얀 구름과 푸른 정원이 차례로 눈을 즐겁게 한다. 한참이나 장난을 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새콤한 향을 맡았는지 작은 나비 한 마리가 주변에서 하늘거리며 날갯짓을 한다.

몸과 마음이 충분히 휴식했다고 생각됐을 무렵 창포원을 향해 차를 달린다. 도로 주변은 금계국 꽃으로 노랗게 물들었다. 한두 곳이 아니고 짧은 거리도 아니다. 거창군에서 의도를 가지고 씨를 뿌린 모양이다. 노란 꽃을 구경하며 달리기 위해 창을 내리고 속도를 줄인다. 어차피 오가는 차도 거의 없는 상황이라서 저속 운행을 해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는 주지 않는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느린 여행은 얼마나 여유롭고 풍요롭고 아름다다운지 직접 경험해본 사람만이 안다. 도시에서 직장 일 때문에, 사람과의 만남 때문에 시달린 온갖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창포원에서의 휴식

낮 최고기온이 29도까지 올라 약간 더운 날씨여서인지 창포원 방문객은 그렇게 많지 않다. 6월 초인데 봄꽃은 이미 많이 졌다. 4년 전 6월 중순에 왔을 때는 대부분 꽃이 절정을 앞뒀거나 최고조였는데 최근 수년간 무더위 탓에 꽃이 피고 지는 시기가 일러진 모양이다. 그래도 곳곳을 잘 둘러보면 샤스타데이지, 꽃창포, 장미, 수레국화 등 약간 시들었지만 아직 예쁘고 화사한 꽃을 여전히 즐길 수 있다.

경남 거창군 창포원을 찾은 관람객들이 수레국화가 핀 정원 옆을 지나고 있다. 남태우 기자 경남 거창군 창포원을 찾은 관람객들이 수레국화가 핀 정원 옆을 지나고 있다. 남태우 기자

꽃은 최고의 상태가 아니지만 창포원은 푸르고 푸르다. 곳곳에 그늘이 짙게 드리운 정자가 설치돼 쉬기에 최상이다. 먼저 꽃창포습지로 향한다. 꽤 넓은 연못은 온통 연잎으로 덮였다. 습지 앞에 장미 군락이 조성돼 빨간 꽃이 탐스럽게 익었다. 꽃은 피는 것이지 어떻게 익는 것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필자는 이곳에서는 익었다는 표현을 쓰고 싶다.

장미꽃 앞에 흥미로운 글자가 서 있다. ‘꽃길만 걷자.’ 사랑하는 두 연인이 이곳을 찾았을 때 이 글자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인근에는 ‘꽃길만 걷게 해줄게’라는 글자가 있다. 청혼할 때 여기서 하면 최고이지 않을까.

경남 거창군 창포원 꽃창포습지 앞 장미군락 일대에 ‘꽃길만 걷자’라는 글자판이 세워져 있다. 남태우 기자 경남 거창군 창포원 꽃창포습지 앞 장미군락 일대에 ‘꽃길만 걷자’라는 글자판이 세워져 있다. 남태우 기자

꽃창포습지 한쪽 모퉁이에 설치된 정자로 향한다. 인근 나무가 드리운 그늘이 얼마나 짙은지, 거짓말을 약간 보태면 앞에 앉은 사람 얼굴이 안 보일 정도다. 가져온 작은 가방과 카메라를 한쪽에 내려놓고 신발을 벗고 편안하게 발을 쭉 뻗는다. 바닥에 눕기는 어려운 상황이라 정자 기둥에 최대한 몸을 기댄다.

선선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면서 온몸을 살살 간질인다. 키득거릴 만큼 간지러운 것은 아니고 상쾌하고 상큼할 정도로 가벼운 정도다. 기분이 좋아지면서 슬슬 졸린다. 잠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본다. 자칫 실수했다간 습지에 빠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한참이나 눈을 감고 등을 기댄 채 쉬었더니 기분은 하늘로 솟구치는 것 같다. 습지를 가로지르는 돌다리 주변에 서 있는 능수버들이 가지를 흔들거리면서 어서 일어나라고 재촉한다.

경남 거창군 창포원 꽃창포습지 정자에 한 여성이 앉아 편안히 쉬고 있다. 남태우 기자 경남 거창군 창포원 꽃창포습지 정자에 한 여성이 앉아 편안히 쉬고 있다. 남태우 기자

■6~7월 만개할 연꽃

꽃창포습지 인근에 외국어를 사용하는 청소년 20여 명이 보인다.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니 국제교류를 하러 온 동남아 학생들인 모양이다. 이들이 선 곳은 수련원과 연꽃원이다. 6~7월 창포원의 하이라이트는 연꽃과 수련인데, 바로 이곳이 그 현장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수련원, 연꽃원으로 향한다. 꽃은 아직 만개하지 않았지만 곳곳에서 한 송이, 두 송이씩 피어났다. 군데군데 노란색과 하얀색 연꽃이 피어올랐다. 아직 꽃을 피우지는 못한 봉우리도 여러 개다. 1~2주일 뒷면 연꽃과 수련이 화려하게 활짝 피어나 많은 관람객의 마음을 정화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2023년 경남 거창군 창포원에 만개한 연꽃 사진. 올해도 이달 말부터 꽃이 활짝 필 것으로 보인다. 남태우 기자 2023년 경남 거창군 창포원에 만개한 연꽃 사진. 올해도 이달 말부터 꽃이 활짝 필 것으로 보인다. 남태우 기자

4년 전 두 곳에서 환상적으로 피어난 연꽃과 수련을 보고 입이 떡 벌어져 한동안 움직이지도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무슨 과장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달 중순 무렵 창포원을 직접 방문해보면 필자가 하는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수련원, 연꽃원은 꽃이 아니더라도 천천히 산책하기에 최고의 공간이다. 두 연못 사이로 버드나무 길이 조성돼 있는데 시원한 바람과 함께 걸으면 이보다 좋을 게 없다. 꿈길을 걷는 것 같은 환상적인 분위기의 돌길이 이어져 있다. 초여름 바람에 낭창거리는 버드나무 가지는 땅에 닿을 듯 축 늘어졌다.

경남 거창군 창포원 수련원 산책로에서 버드나무 가지가 낭창거리고 있다. 남태우 기자 경남 거창군 창포원 수련원 산책로에서 버드나무 가지가 낭창거리고 있다. 남태우 기자

수련원, 연꽃원을 지나면 자연주의정원이다. 어찌 보면 황량한 언덕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름 그대로 인간의 손길이 가장 덜 느껴지게, 자연스럽게 꾸민 정원이다. 정원 뒤편에 오각형 쉼터가 보인다. 중년여성 3명이 앉아 편안하게 시간을 보낸다. 그들의 자세를 보니 결코 서두를 생각이 없다. 가서 앉아보고 싶지만 그들에게 일어나라거나 비키라고 할 용기가 없다.

오각형 쉼터 앞에는 처음 보는 꽃이 있는데 네이버에 물어보니 분홍바늘꽃이라고 한다. 앞에는 분홍색 꽃과 하얀 샤스타데이지가 널렸고, 옆으로는 푸른 풀들이 덮였고, 뒤로는 파란 하늘과 잎이 무성한 나무 한 그루가 섰다. 이걸 낭만적이라고 해야 할까, 환상적이라고 해야 할까, 비현실적이라고 해야 할까.

경남 거창군 창포원 자연주의정원의 오각형 쉼터에서 관람객들이 휴식하고 있다. 남태우 기자 경남 거창군 창포원 자연주의정원의 오각형 쉼터에서 관람객들이 휴식하고 있다. 남태우 기자

■나무 아래 그늘마다 정자

자연주의정원 바로 옆은 버들습지와 바람개비광장이다. 지난 5월만 해도 수레국화와 작약, 노란꽃창포로 가득 메워졌던 곳이지만 지금은 파란 풀이 뒤덮여 있다. 세상을 다 뒤덮은 것 같은 풀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눈동자까지 푸르러지는 기분이다. 잎이 우거진 각종 나무 아래에는 정자 여러 개가 보인다. 빈자리라고는 하나도 없이 정자마다 사람들이 앉아 있다. 지금 이 날씨에 저곳에서 쉬는 것만큼 좋은 휴식, 피서는 없다는 뜻이다.

물이 졸졸 흐르는 작은 개울가에도 정자가 보인다. 그곳만 딱 비어 서둘러 달려가 앉는다. 신발을 벗고 올라가 바닥에 엉덩이를 붙인다. 정말 편하기 이를 데 없다. 개울에 흐르는 물소리,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소리 말고는 인위적인 소리라고는 하나도 없다. 이곳에 여행 온 사람들도 분위기를 파악한 것인지 조용히 소곤거릴 뿐이다.

한 가족이 경남 거창군 창포원 나무 그늘 아래 정자에서 쉬고 있다. 남태우 기자 한 가족이 경남 거창군 창포원 나무 그늘 아래 정자에서 쉬고 있다. 남태우 기자

원래 이 주변은 지난달만 해도 노랑꽃창포가 덮인 곳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푸르다. 할머니 두 분이 서로 사진을 찍어주면 깔깔거린다. 가만히 보니 영상도 같이 찍는 모양이다. 나이 드신 분이 영상을 찍는 경우는 꽤 보기 드문데 재미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개울가 정자에 앉아서 가만히 살펴보니 주변 곳곳에 꽃이 꽤 많이 보인다. 시들기는 했지만 보라색 꽃창포는 물론 하얀 샤스타데이지도 군락을 이뤘다. 수레국화도 한쪽에 모여 바람을 따라 한들거린다. 꽃밭 너머는 강변인데 거기에는 맨발걷기 코스가 마련됐다. 하지만 그늘이 없어 뙤약볕 아래서 걷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한 모자가 경남 거창군 창포원 샤스타데이지 군락 앞을 지나고 있다. 남태우 기자 한 모자가 경남 거창군 창포원 샤스타데이지 군락 앞을 지나고 있다. 남태우 기자

개울가 정자에서 한참이나 쉬다 다시 일어난다. 가족과 함께 놀러온 게 아니라 일하러 온 것이니 더 열심히 사진을 찍어야 한다. 조금만 더 걸어가니 그야말로 총천연색 정원이 나타난다. 매년 5~6월에 장미가 만개하는 장미원이다. 하이킹을 즐기던 한 부부는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즐거운 표정이다. 중년 여성 세 명도 밝은 표정으로 꽃 사이에 들어가 끊임없이 휴대폰을 찰칵거린다.

경남 거창군 창포원 장미원에 빨간 장미가 활짝 피어 화사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남태우 기자 경남 거창군 창포원 장미원에 빨간 장미가 활짝 피어 화사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남태우 기자

이제 창포원의 마지막 코스다. 장미원을 지나면 입구 쪽이기도 하고 출구 쪽이기도 한 창포원방문자센터 방향이다. 센터로 가기 전에 샤스타데이지와 분홍바늘꽃이 활짝 핀 소정원이 나타난다. 한쪽 모퉁이에는 그늘이 짙게 드리운 정자가 보인다. 돌아가기 전에 피로도 풀 겸 저곳에서 잠시 눈을 붙여야겠다. 마침 부부와 아들로 보이는 세 사람이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인다. 정자 기둥에 기대어 두 발을 쭉 뻗고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스르르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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