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밥맛 역전 가능할까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육종 기술 발전 한국산 신품종 도약
재배 면적 기준 일본계 4%로 급감
아키바레 등 사실상 시장 퇴출 수순

쌀값 폭등 탓 일본서 한국 쌀 인기
“맛있어 놀랐다” 소비자 호평 많아
쌀농사 교류 한일 밥맛 경쟁 기대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2025-05-24 08:00:00

‘쌀은 단백질 함량이 적어야 맛있는데, 한국에서는 수확량을 늘리려 비료를 많이 쓰기 때문에 단백질 비중이 커집니다. 품질보다 양을 중요시하는 것이지요. 일본 쌀에 비해 질이 떨어집니다.’

21일 일본 포털 야후재팬에 배포된 ‘한국 쌀 인기 급등, 전문가 진단’ 기사는 재배법과 미질 차이에 따른 우위를 따졌다. 이 기사는 최근 일본 쌀값이 폭등하자 온라인에서 한국 쌀을 구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한국에까지 와서 쌀을 구입하려는 일본인이 늘어난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기사에서 짐작되듯이 일본인은 미질에 민감하다. 스시(초밥)의 밥알은 풀어지듯 씹히면서도 쫀득해야 하고, 사케(일본 전통주) 재료 쌀은 전분 외의 잡성분이 적어야 된다. 일본에서 벼 종자 개량 기술이 발달한 이유다.

하지만, ‘한국산은 질보다 양’이라는 관념은 과거에는 옳았지만 지금은 틀렸다. 일본계 벼 품종이 특유의 찰기와 윤기로 한국 시장에서 절대적 강자였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육종 기술이 역전되면서 벼 재배 면적 기준으로 일본계의 비중은 4%로 폭락했다. 한국 자체 개발 품종이 선전하면서 50년 간 한국인의 식탁을 점령했던 고시히카리, 아키바레(추청)는 퇴출 중이다. 왜냐고? 한국산 밥맛의 경쟁력이 월드 클래스급으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일본의 기억 속에 있는 과거의 한국 쌀은 퇴장했다. 쌀값 폭등 덕분에 일본이 마주한 한국 밥맛은 예상 밖의 진화를 거듭한 결과물인 것이다.


국내 벼 재배 면적당 외래종은 2017년 11%에서 지난해 4%로 급감했다. 고시히카리, 아키바레 등 일본계는 사실상 퇴출되고 국산 신품종 ‘해들’, ‘알찬미’ 등으로 속속 대체되고 있다. 농촌진흥청 자료. 국내 벼 재배 면적당 외래종은 2017년 11%에서 지난해 4%로 급감했다. 고시히카리, 아키바레 등 일본계는 사실상 퇴출되고 국산 신품종 ‘해들’, ‘알찬미’ 등으로 속속 대체되고 있다. 농촌진흥청 자료.

□ 한반도 전래 쌀 재배 기술 발전시킨 일본


“쌀은 대단히 위험한 음식이다!”

음식 만화 ‘맛의 달인’ 저자 가리야 데츠는 일본인들이 쌀에 집착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온 국민이 쌀 중독증을 앓고 있는데, 그 이유가 “밥이 너무 맛있기 때문”이란다. 밥을 너무 좋아해서, 맛있게 먹으려 반찬을 짜게 만드는 탓에 성인병까지 유발한다는 주장은 과장과 엄살이 섞였지만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도 있다.

일본은 미질에 진심이다. 일본 사케 양조장은 특정 벼 품종을 확보하려 직접 농사를 짓는 곳이 많다. 주조호적미(酒造好適米), 즉 술을 담그는 데 최적으로 개량된 품종만 100여 개가 넘는다. 쌀알이 큰 편인 야마다니시키, 고햐쿠만고쿠가 대표적이다. 술에 잡미를 유발하는 단백질과 지방 성분이 최소화되게끔 개량됐다. 탄수화물의 결정체인 심백(心白)이 많아야 깔끔한 사케의 맛을 낼 수 있다. 초밥용 쌀은 부드럽게 씹히되 점성이 느껴져야 하고, 초를 섞은 뒤 풀어지지 않아야 한다. 대표 품종이 고시히카리다.

일본 최초의 벼 재배지는 한반도 남부와 가까운 일본 사가현 요시노가리. 한반도 등에서 벼 재배 기술을 가진 세력이 기원전 3세기부터 건너가 농경 사회를 형성하고 정주 문화를 발전시켰다. 일본이 문명 시대로 진입하는 혁명을 일으킨 셈이다. 근대 이후 일본은 쌀 재배 기술을 발전시켰고, 이는 한반도로 역류했다. 20세기 초반 일본 농학자들은 쌀을 열대형인 인디카와 온대형인 자포니카로 나누는 등 전 세계 쌀 육종 기술을 선도하기에 이른다. 적어도 1960년대 한국이 일본을 뛰어넘는 육종 기술의 자립을 이루기 전까지 한국은 줄곧 일본의 그늘에 있었다.


일본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 내 한국 농협 페이지에 등록된 전남 해남산 '땅끝햇살'. 오른쪽 후기는 ‘찰기 있는 식감이 좋았다’ ‘기대 이상의 맛이어서 놀랐다’ 등 호평 일색이다. 일본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 내 한국 농협 페이지에 등록된 전남 해남산 '땅끝햇살'. 오른쪽 후기는 ‘찰기 있는 식감이 좋았다’ ‘기대 이상의 맛이어서 놀랐다’ 등 호평 일색이다.

□ 한국, 세계 최초 자포니카·인디카 교잡 성공


박정희 정부는 1960년대 인구 증가로 쌀이 부족해지는데 미국 곡물 원조가 유상으로 바뀌자 쌀 증산에 정권의 명운을 걸게 된다. 맛의 자포니카, 양의 인디카.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두 품종의 장점을 고루 갖춘 교잡종에 욕심이 가는 건 당연했지만 언감생심이었다. 육종 선진국 일본도 일찌감치 포기한 터였다. 교잡종이 불임이라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은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불굴의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급기야 중앙정보부 요원이 이집트에 잠입해 일본 품종으로 만든 열대성 자포니카 ‘나다’ 종자를 밀반출할 정도로 총력을 쏟아부었다.

획기적인 다수확 품종의 꿈은 결국 600여 차례 교배 실험 끝에 현실화된다. 1969년 허문회 박사가 불임이 아니면서도 인디카의 좋은 형질을 유지한 교잡종 IR667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훗날 통일벼로 명명된 이 신품종을 언론은 ‘벼 곱절 거둘 수 있다. 기적의 쌀 재배 성공’이라고 환호했다. 당시 국정 최대 현안이었던 보릿고개 극복과 극일 정서를 감안하면 국가적 쾌거다.

통일벼는 식량난에 처한 한국은 물론 저개발 국가에 복음이었다.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네팔, 베트남, 부탄에서 통일벼 계통을 받아들였고, 한국은 지금도 아프리카 국가들에 현지 기후와 토양에 맞는 개량종 지원을 계속하고 있다.

세계 최초로 인디카와 자포니카 교잡에 성공한 것은 과학기술의 성과에 그치지 않는다. 동아시아에서 벼와 벼농사에 대한 담론은 국가적 정체성과 맞물린다. 또 일제 강점기 때 일본 품종과 농업 기술을 강제로 받아들였던 한국이 일본도 포기한 육종에 성공한 것은 일본의 그늘을 벗어나 독자적 행보를 걷는 계기가 됐다. 통일벼 개발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농학자들이 1970년대 이후 한국 논을 점령한 일본계 품종 타도에 나선 것은 기술적 자부심의 발로였다.




<부산일보> 1971년 2월 1일 자 8면 기사. 밀양군은 ‘기적의 볍씨’로 알려진 IR667 시험 재배 결과, 수확량이 30% 늘어남에 따라 밀양 상남면 농가 84세대에 확대하기로 했다는 내용이다. IR667은 훗날 통일벼로 명명된다. <부산일보> 1971년 2월 1일 자 8면 기사. 밀양군은 ‘기적의 볍씨’로 알려진 IR667 시험 재배 결과, 수확량이 30% 늘어남에 따라 밀양 상남면 농가 84세대에 확대하기로 했다는 내용이다. IR667은 훗날 통일벼로 명명된다.


□ 아키바레 등 일본 품종 50년 만에 퇴출


1970년대 한국에 들어온 아키바레는 단숨에 한국인의 밥상을 점령했다. 고슬고슬해서 식감이 좋고 식어도 밥맛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학계와 농업 당국은 이를 한국 육종 기술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로 받아들였다. 신품종이 속속 개발됐고, 농민과 소비자들의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1989년 국산 품종인 동진이 아키바레를 누르고 재배 면적 1위에 오르는 성과를 낸다. 이어 해들, 알찬미, 새청무, 삼광, 일품, 친들, 영호진미 등 국산 주자들이 약진했다.

한국산 품종의 경쟁력은 어떨까? 농촌진흥청 주최로 2013년 초밥용 쌀 블라인드 테스트가 있었다. 국산 품종과 고시히카리를 무작위로 주고 일식 요리사들에게 초밥을 만들게 한 결과, 국산인 호품과 신동진이 고시히카리를 제치고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밥맛의 역전이라고 할까.

이처럼 국산 벼 품종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지난해 전체 재배 면적 69만 4404㏊ 중 아키바레, 고시히카리, 히토메보레, 밀키퀸 등 일본계는 도합 2만 7766㏊, 4%에 그쳤다. 2017년 11%에 비하면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일본 품종은 경기도의 재배 면적이 컸는데, 외래종과는 어울리지 않는 ‘임금님쌀’ 브랜딩에 대한 문제의식까지 겹치면서 최근년 경작지가 급감하고 국산으로 속속 대체되는 추세다.



일본 쌀값 폭등으로 한국에서 쌀을 구입해서 돌아가려는 일본인을 위한 안내 블로그. 글의 제목은 ‘한국 쌀 반입 방법. 검역 절차와 주의점’이다. 일본 쌀값 폭등으로 한국에서 쌀을 구입해서 돌아가려는 일본인을 위한 안내 블로그. 글의 제목은 ‘한국 쌀 반입 방법. 검역 절차와 주의점’이다.

□ 한국 밥맛 호평하는 일본 소비자


한국 품종 쌀은 지난달 첫 10t이 일본에 수출되어 완판되고 추가 선적도 이어지고 있다. 쌀 수출은 통계가 작성된 1990년 이후 35년 만에 최대 물량이다. 일본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 내 한국 농협 페이지에서는 전남 해남산 ‘땅끝햇살’이 불티나게 팔렸다. 품종은 국산 새청무다. 밥맛에 까다로운 일본 소비자들의 구매 후기는 호평 일색이다.

“일본의 혼합미보다 낫다. 다시 구매하겠다.’ ‘찰기 있는 식감이 좋았다. 맛있었다.’ ‘기대 이상의 맛이어서 놀랐다.’ 일본산에 비해 저렴한 가격 경쟁력의 영향도 컸지만, 사실상 일본 소비자에 처음 노출된 상황에서 밥맛에 후한 점수를 받은 것에 의미가 있다.

이는 벼 재배에 있어 한일 사이 ‘기울어진 운동장’ 시대가 끝났다는 점을 시사한다. 대등한 밥맛 경쟁 시대로의 전환인 셈이다. 한국과 일본은 고대로부터 쌀 재배를 매개로 문명 교류와 함께 미묘한 자존심 대결을 이어왔는데, 이번 일본 쌀 가격 폭등 시기에 한국산 쌀의 품질 수준이 재조명되면서 변곡점을 만났다.

사실 벼 품종뿐만 아니라 밥 짓는 기술에서도 한국은 열세였지만 극적인 반전을 이룬 상태다. 한국 기업들이 전기밥솥에 가마솥 내부의 초고압 원리를 구현하면서 밥 짓는 기술에서도 역전이 일어났다. 밥솥 내부 밀폐로 증기압을 높여 끓는점을 100℃ 이상 올리는 기술인데, 쌀을 빠르고 고르게 익혀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윤기와 점성을 유지하게 만든 것이다. 한국 주부들이 더이상 일본의 코끼리표(조지루시) 전기밥솥을 선망하지 않게 된 이유다.

일본 쌀값 폭등이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로 한국의 신품종 쌀이 일본 소비자들을 만나게 됐다. 엇갈리는 평가가 있지만 적어도 일본 소비자 만족도는 합격점을 받고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벼 재배와 밥 짓기 기술로 교류해 온 한국과 일본 사이에 개성적인 밥맛 경쟁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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