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 2025-05-25 09:00:00
어느 날 문득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해야 할 일들이 잔뜩 쌓여 있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익숙한 일들이 어느 순간 버거워졌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기에 마지못해하지만, 마음은 불안정하다. 미룰 수 있는 일들은 나중으로 미뤘다. 그 미뤘던 일들이 더 급한 일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왜 이렇게 무기력하고 게을러졌는지 자책한다. 유튜브 영상을 보거나 게임을 하면 잠시 기운이 나는 듯했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더 큰 무기력이 짓누른다.
“내 이야기 같은데”라고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서울대 의대에서 석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서울대병원을 비롯해 여타 병원에서 오랜 임상경험을 쌓은 배종빈 정신과 전문의. 그가 출간한 〈나는 왜 아무것도 하기 싫을까〉에서 밝힌 자신의 경험담이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고 호소하는 환자를 자주 만났지만, 저자는 자신이 무기력을 겪기 전까지 그 고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환자들에게 의지나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라고 진심 어린 위로를 보냈지만, 그들은 잘 낫지 않았다.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뇌과학 정신과학 심리학 연구를 통해 저자는 실제로 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접근법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그 경험과 통찰을 나누고 싶어 쓴 글이다.
책은 4장으로 구성돼 있다. 1장은 무기력의 원인을 파헤친다. 뇌과학적으로 인간이 문제를 외면하는 이유는 그 행동이 이익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뇌 속 편도체는 불안과 공포를 담당하는 부위로, 스트레스가 많은 상황을 피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낸다. 불편한 감정이 줄어들면 뇌는 문제를 피하는 것이 보상받을 만한 행동이라고 학습하고 점점 더 문제를 외면하는 습관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편도체의 멈춤 신호를 강하게 만들까. 대표적인 원인은 만성적인 스트레스이다. 저자는 통제할 수 없는 상황과 감정 조절로 생기는 스트레스를 설명한다. 타인, 죽음, 질병 등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 할 때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무기력만 남는다.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여 통제할 수 있는 것만 집중해야 한다. 감정은 오히려 통제하거나 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무기력한 모습조차 자신의 일부라는 걸 인정할 필요가 있다.
2장에서는 무기력한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중독에 빠지고, 그 중독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무엇인지 말한다. 중독된 물질, 중독된 행위를 통해 잠시나마 무기력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문제는 점점 그 대상에 의존하며 무기력이 더 악화된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중독 대상을 구하기 위해 돈을 지급해야 했다면, 지금은 돈을 지급하지 않고 시간을 지급한다. 영상 플랫폼에선 무료로 수많은 영상을 시청할 수 있고, SNS도 자유롭게 이용한다. 과거에 돈은 잃는 것이 보였지만, 지금의 중독은 잃는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힘들다.
저자는 중독 행위를 번거롭게 만들어 그 행위가 반복되지 않는 방법을 제안한다. 영상 플랫폼이나 SNS를 스마트폰 첫 화면에 두지 말고, 여러 애플리케이션이 있는 폴더 안에 넣고, 그 폴더는 페이지를 여러 번 넘겨야 보이는 곳에 두자. 확실히 중독 행위가 줄어든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3장은 무기력을 바라보는 관점과 일상의 실천법을 설명한다. 무기력한 사람은 의사 결정으로 인한 피로를 더 크게 느낀다. 이 과정을 줄여야 한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해야 할 일을 먼저 한 후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더 큰 보상감이 온다는 걸 확실히 인지하는 것이 좋다.
4장은 무기력을 일으키는 질환을 소개한다. 갑상선 기능 저하증, 번아웃, 수면 장애 등을 짚어보고 정확한 진단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저자는 무기력은 고장이 아니라 변화가 필요하다는 신호이며 삶의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어김없이 계절이 오는 것처럼, 무기력을 자연의 순환으로 생각하고 무기력도 반드시 끝이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전한다. 배종빈 지음/포레스트북스/268쪽/1만 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