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 | 2025-07-29 09:00:00
유럽 추상 미술의 대표 예술가인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보다 앞섰다는 추상 미술 선구자 힐마 아프 클린트(1862~1944). 그를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대규모 회고전 ‘힐마 아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이 지난 18일 부산 사하구 부산현대미술관 2층 전시실5에서 개막했다. 힐마의 주요 회화 연작을 중심으로 드로잉과 기록 자료를 포함한 총 139점을 선보인다. 전시는 10월 26일까지 계속된다.
■‘현대’미술관이 근대 작가를 소환한 이유
이번 전시는 몇 가지 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하게 되는 질문은, “지금 이 시점에 우리는 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그를 다시 불러야 하는가’이다. 여기엔 근대를 살다 간 스웨덴 출신 화가의 국내 최초 대규모 회고전을 ‘현대’미술관에서 여는 이유도 포함된다.
부산 전시 제목 ‘적절한 소환’은 그렇게 해서 붙은 것이다. 전시를 담당한 최상호 학예연구사는 “힐마가 추상 회화라는 독자적 형식을 선취했지만, 당시에는 받아들여질 수 없을 만큼 시대를 앞서 있었기 때문에 생전에는 작품을 공개하지 않았다”며 “이번 전시는 그런 과정을 돌아보며 우리가 그 작품을 어떻게 마주하고 감각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기회를 제공한다”라고 전했다.
힐마의 성취는 1986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뮤지엄(LACMA·라크마)에서 열린 전시에서 처음 알려졌고, 2018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전시에 관람객이 60만 명이나 몰리고, 영국 테이트 모던도 따로 전시를 마련하는가 하면, 영화 등으로도 제작되면서 선풍을 일으켰다. 올봄엔 일본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3개월간 전시했고, 이번에 아시아 순회전 일환으로 부산을 찾았다.
부산 전시는 도쿄 때보다 더 널찍한 공간을 활용해 작품이 두세 줄로 겹치는 걸 피했고, 전시장 조도는 조금 더 밝혔다. 힐마 아프 클린트 재단은 페인팅의 경우 150럭스, 지류(종이)는 30럭스를 기준으로 제시했다. 또한 독립 웹사이트를 구축해 힐마 관련 자료를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 리플렛도 일반 해설과 쉬운 해설 2종을 제작했다. 겨자색의 ‘쉬운 해설’을 펼치면 뒷면은 힐마의 장미 연작이 그려진 전시 포스터가 나온다.
전시는 작가의 생애와 작업 흐름을 따라 7개의 주요 장면으로 구성한다. ‘대면’ ‘상징의 미로’ ‘보이지 않는 세계’ 같은 사유적 성격의 소제목을 붙였다. 작품 번호는 1972년 그의 조카에 의해 설립된 힐마 아프 클린트 재단에서 사용하는 관리 번호(HAK)를 따랐다. 전시 서문은 출구 쪽에 배치됐다. 공간 구성도 독특하다. 전시장을 가로지르는 격벽에 통창을 냈다. 가로세로로 낸 기다란 통창은 초기작을 보면서 후기 회화를 멀찍이 볼 수 있도록 하는 등 다층적 구조한다. 재단 요청에 따라 연대기적 전시를 하면서도 약간은 다른 장치를 둔 셈이다. 최 학예연구사는 “과거 100년이 넘은 작품을 동시대 미술을 다루는 ‘현대’미술관에서 다룰 때 어떻게 동시대성과 연결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93점 연작 ‘신전을 위한 회화’ 일부 소개
‘대면’이 첫 장면이다. 아버지 초상화로부터 시작해 식물·풍경화 등 정밀하게 그린 그의 초기 작업이 전시된다. 힐마는 스웨덴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우등으로 졸업했지만 여성은 삽화나 식물학 도감을 그리는 길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수의학 연구소에서 삽화가로 근무하게 된 힐마가 종이에 흑연으로 그린 ‘말의 대가리를 그린 습작’(1900~1901)이 인상적이다. 말 머리를 연 그림이다. 내부를 바라보면서도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상한 힐마의 세계관이 엿보인다.
‘상징의 미로’ 장면에선 신지학이라는 사유를 통해 보이지 않는 질서를 탐색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힐마는 네 명의 여성과 함께 1896년 영적인 모임 ‘5인회’를 구성해 정기적으로 드로잉과 기록을 남겼다. 일종의 영매랄까, 한국 무당 같은 느낌으로 뭔가를 기록한 것이다. 이 모임은 단순한 신비주의 활동을 넘어 집단적인 예술 실천과 자동주의 기법 드로잉의 가능성을 탐색한 것으로 전해진다. 5인회는 1908년 해단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 장면부터는 작가의 대표 연작인 ‘신전을 위한 회화’가 등장한다. 무려 193점에 이르는 연작으로, 1906년부터 1915년까지 ‘태초의 혼돈’ ‘에로스’ ‘대형 형상화’ ‘10점의 대형 그림’ ‘진화’ ‘인식의 나무’ ‘백조’ ‘제단화’ 등 10개의 연작을 완성한다. 이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라 할 만한 ‘10점의 대형 그림’은 1907년 제작된 약 3m에 달하는 캔버스 10점으로, 인간 생애를 네 단계로 다룬다. 각각의 화면은 원·나선·곡선 등 자유로운 형상과 색채 운동으로 가득 차 있으며 힐마의 작업이 새로운 단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제단화’ 역시 지어지지 않는 상상의 공간을 정신적으로 완성한 회화라는 점에서 또 다른 차원의 그림이다.
‘단순한 침묵’부터 마지막 장면 ‘흔적의 직조’까지는 ‘신전을 위한 회화’ 이후 전개한 ‘원자’ ‘파르시팔’ ‘무제’ 등 또 다른 연작과 그에 대한 기록물을 소개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만한 대목은 ‘청색화첩’이다. 이 화첩에 그는 수많은 기록과 그림을 남겼다. 이 작업은 단순한 스케치가 아니라 전체 예술 전체를 다시 점검하는 과정이었다. 예를 들면, 그의 원작이 있고, 그것을 소형으로 축소해 사진으로 촬영하고, 그 사진을 참고해 작은 크기의 드로잉을 반복적으로 복기하며 새로운 변형을 시도하는 식이다. 감각을 끊임없이 복기해 온 그가 놀랍기만 하다. 또 다른 그의 방대한 ‘공책’들도 그의 작업 과정뿐 아니라 작가가 감각 과정을 시각 언어로 재해석한 흔적을 보여준다.
전시 기간엔 다큐멘터리 ‘힐마 아프 클린트-미래를 위한 그림’(감독 할리나 디르스츠카, 94분, 2019년)을 전시장에서 관람할 수 있다. 또 다른 전기 영화 ‘힐마’(감독 라세 할스트룀, 2022년, 119분)는 영화의전당 소극장에서 감상할 수 있다. 영화의전당 상영은 힐마 전시 입장권 또는 온라인 예매 내역을 보여주면 무료 관람이 가능하다. 전시는 유료이며, 성인 1만 원, 어린이와 청소년 6000원이다. 오전 10시~오후 6시 관람 (월요일 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