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국 기자 ksk@busan.com | 2025-01-02 18:06:16
“서로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의회 민주주의 정치인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죠.”
탄핵 정국으로 연초부터 여야 갈등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 정치 원로인 ‘의회주의자’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여야가 국민 앞에서 정치인의 자격을 돌아봐야 할 시점이라고 말을 꺼냈다.
정 전 의장은 5선 국회의원에 19대 후반기 국회의장까지 맡아 국회 의사당에서 질곡의 세월을 보냈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여야 간 교감의 여지가 많았던 시절이라고 했다. 그는 “상임위를 같이 하고, 행사도 같이 다니면서 야당 의원 80%의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었을 정도였는데, 이제는 초선은커녕 3선 이상의 중진끼리도 여야 간 대화가 단절됐다”며 안타까워 했다.
정 전 의장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의회 민주주의의 덕목은 대화와 타협이다. 그러나 22대 국회는 거대 야당의 등장으로 대화와 타협의 필요성이 사라졌고, 그 뒤로 국회가 자멸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정 전 의장은 “권력의 행사에도 어느 정도 힘 조절은 필요하고, 이런 행태로는 국민의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기본적인 인식이 필요한데 지금의 야당에는 그게 없다”면서 “이재명 대표를 보호하고 대권가도에 올려놓겠다는 데만 몰두하니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정 전 의장은 이런 시국일수록 국민이 눈을 부릅뜨고 의정 활동을 지켜보고 있다는 강한 압박이 필요하다고 했다. 가급적이면 외부에 말을 아끼는 그가 연말 이후 굳이 많은 인터뷰를 소화하며 입을 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물론, 12·3 비상계엄 사태를 일으킨 대통령실과 여당에 대한 쓴소리 역시 잊지 않았다. 아예 이번 비상계엄 사태를 ‘대통령제의 저주’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한계에 윤석열 대통령 개인의 인격 문제까지 더해지면서 벌어진 비극이라는 것이다. 정 전 의장은 “5년 단임제건, 4년 중임제건 간에 대통령제는 이제 놔줄 시점이 됐다. 내각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1948년생 정 전 의장은 1948년 탄생한 제헌헌법과 나이가 같다. 그는 “‘87 체제’가 출범한 이후 6명의 대통령을 곁에서 지켜봤지만 하나같이 대통령만 되면 무소불위로 권력을 누려도 되는 걸로 착각한다”면서 “국민 역시도 2000년 넘는 세월 전제군주국가에서 살아온 DNA가 남아 있어 대통령을 왕 정도로 여기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청와대 비서진이 대통령을 등에 업고 내각 위에 군림하고, 국회의원은 해산의 페널티 없는 현재 구조는 한계에 다달았다는 진단이다.
정 전 의장은 포르투갈 식의 ‘반(半) 대통령제’를 제안했다. 현실적으로 당장 내각제로의 개편은 불가능한 만큼 과도기적인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 그는 “일단 내각제로 가가 위해서는 내각을 구성할 국회의원에 대한 신뢰가 필요한데 현재 이런 수준의 국회의원으로는 내각제가 안된다는 인식이 강하다”며 “익숙하게 대통령은 직선으로 선출하되, 기본적인 권한과 역할만 맡고 나머지는 의회에 맡겨야 한다”고 설명했다.
점진적으로 내각제의 골격이 갖춰지면 나라 살림살이에 대한 국회의원의 책임감이 커지고 최악의 경우 전부 해산하고 새로 선거를 해야하는 만큼 망동을 할 수 없다는 게 정 전 의장의 설명이다.
마지막으로 정 전 의장은 여야 간의 극한 대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후배 국회의원들에게 자기성찰을 주문했다. 그는 “국회의원을 왜 해야 하고, 왜 하고 있는가 끊임 없이 되물어야 한다”면서 “그런 행동이 없으면 그저 계보 정치, 줄서기 정치만 생각하는 정치꾼이 될 수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국회의원을 몇 번 하든 묘비에 적힐 직함은 ‘전 국회의원’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했다. 다음 선거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생각하고, 한 번의 임기로 국회의원을 마치더라도 제대로 마치는 게 중요하다는 원로의 일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