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유정 기자 honeybee@busan.com | 2025-11-25 15:31:44
배우 김향기가 영화 ‘한란’으로 스크린 나들이에 나선다. 트리플픽쳐스 제공
“부끄럽지만 작품을 만나기 전에는 제주 4·3 사건을 잘 몰랐어요.”
배우 김향기는 26일 개봉하는 영화 ‘한란’을 준비하며 4·3 사건을 처음 깊게 공부했다고 말했다. 제주 지역을 직접 둘러보며 감독이 건넨 자료를 봤고, 4·3 연구소에서 발간된 여성 생존자들의 증언집까지 읽었다.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향기는 “자료를 읽을 때 괴롭기도 했다”며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감정으로 사건을 바라본 경험은 새로웠다”고 했다.
김향기는 1948년 제주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딸 해생을 지키기 위해 산과 바다를 건너는 해녀 아진을 연기한다. 아역 배우로 연기 생활을 시작해 스물다섯 살이 된 그가 처음 맡은 엄마 역할이다. 김향기는 제주 역사와 문화 등을 고려해 아진 캐릭터에 다방면으로 접근했다. 촬영 전부터 제주 로케이션 현장을 살폈고, 4·3 기념관을 찾기도 했다. 제주의 ‘삼춘’ 호칭 문화, 한 다리만 건너면 모두가 연결되는 공동체 정서, 물질로 단련된 체력과 생활감 등도 자연스럽게 캐릭터에 녹였다. 김향기는 아진을 “딸에게 친구 같은 엄마였을 것”이라며 “몸이 건강해서 정신으로 그 건강함이 이어진 인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준비 과정에서 가장 부담이 컸던 부분은 제주어였다. 김향기는 촬영 전 두 달 동안 제주어 감수자와 일대일로 수업을 받으며 억양을 익혔다. 이동 중에도 대사 녹음 파일을 반복해 들었지만, 쉽진 않았단다. 김향기는 “사투리라고 인식할수록 감정이 끊어지는 어려움이 있었다”며 “제주어를 제2외국어라고 생각하니 감정이 더 잘 붙었다”고 웃었다. 작품 속 캐릭터마다 미세하게 다른 억양을 이 작품 안에서 하나의 톤으로 맞추는 작업도 현장에서 오래 논의해 결정된 것이라고 했다.
모녀 호흡을 맞춘 아역 배우 김민채와의 촬영 경험은 특히 인상 깊었다. 그는 “김민채 배우가 만 6세였지만 한 명의 배우로 생각하고 함께 했다”고 말했다. 촬영 전 만화와 간식 취향을 묻고, 도토리를 줍거나 풀이나 버섯 같은 자연을 관찰하며 편안한 관계를 만들었다. 그는 “과하게 챙기면 오히려 불편해한다”고 귀띔했다. 그는 “여섯 살에 ‘마음이’를 촬영하며 엄마와 나무 열매를 따먹던 경험이 기억에 남았다”면서 “민채에게도 그런 즐거움이 남길 바랐다”고 했다.
올해 데뷔 23년 차가 된 그는 스무 살이 넘으며 새롭게 느낀 고민도 솔직하게 털어놨다. 김향기는 “아역 때부터 형성된 사랑스러운 이미지와 성인 연기자로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충돌해 20대 초반엔 힘들기도 했다”며 “즐거움을 드려야 한다는 마음과 다양한 역할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부딪히니 스스로 틀이 갇히게 되더라”고 했다. 오랜 고민 끝에 그가 선택한 건 ‘단순함’이다. “작품 선택 기준을 단순하게 바꿨어요. ‘내가 이 역할을 해낼 수 있는지’만 생각했죠. 마음을 가볍게 만드니까 좋더라고요. 마음에 와닿는 이야기를 우선으로 두니까 장르와 필모그래피는 자연스럽게 따라오더라고요.”
김향기는 극장을 사랑하는 배우다. 그는 “영화 상영 시간 동안 관객을 한 공간에 묶어두는 극장의 힘이 좋다”며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현장에서 계속 배워서 언젠가 연출에도 도전해보고 싶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작품을 읽다가 생각이 복잡해지면 길을 따라 천천히, 오래 걸어요. 주변의 자연과 사람들을 바라보면 감정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머릿속이 정리되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연기를 시작했지만, 저는 연기가 여전히 좋아요. 앞으로도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배우가 되겠습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