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 기자 rplkim@busan.com | 2025-09-14 08:00:00
퇴직연금은 고령화 사회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는 한국 국민들의 노후 준비에 있어 ‘마지막 보루’이자 ‘희망’으로 불린다. 저출산·고령화가 심화하고 국민연금의 장기 재정 불안감이 가시화하면서 개인의 자산 축적과 은퇴 후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제도로 주목받아 왔다. 정부와 정치권 역시 지난 10여 년간 퇴직연금의 가입 확대와 운영 다변화를 통해 개인의 노후 대비를 강조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정부의 ‘이상행보’가 감지된다. 그간의 기조와 모순된 듯한 제도 변화를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주식형 토털리턴(TR) 상장지수펀드(ETF) 금지, TDF(타깃데이트펀드) 내 안전자산 편입 제한 검토, 퇴직연금에 건강보험료 부과 검토 등이 대표적이다. 시장에서는 “정부가 노후 준비의 필수라고 강조해 왔던 제도를 이제와 세수 등을 원인으로 손을 대 이득을 챙기려 한다”는 비판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해외주식형 TR ETF 폐지, 퇴직연금 신뢰 흔들어
퇴직연금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가장 먼저 무너진 논란은 다름 아닌 해외주식형 TR ETF 폐지다. 배당금 자동 재투자로 과세 이연 효과를 제공했던 해외주식형 TR ETF가 사라지면서 정부에 대한 투자자들의 불만이 높아진 상태다. 앞서 지난 1월 16일 기획재정부는 세법시행령 개정안 입법예고를 통해 TR ETF 상품을 국내주식형에만 허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세제 형평성을 높이고 국내 시장 활성화라는 목적에서다.
하지만 투자자들 입장에서는 ETF가 배당금을 알아서 재투자하며 장기 투자로 복리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는데, 향후 동일한 효과를 누리려면 배당금으로 ETF를 다시 사야 하는 수밖에 없다. 매매 비용도 추가로 부담해야 한다. 한 투자자는 “투자 방법이 간편해 장기 투자를 위해 해외주식형 TR ETF 상품을 애용해왔다”면서 “퇴직연금 제도를 지나치게 손보려는 정부의 움직임에 그냥 해지하고 해외주식에 직접 투자할까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시장에서는 지난 1월 기준 국내에 상장된 6조 원 규모의 해외주식형 TR형 ETF에서 이미 상당한 자금이 유출돼 해외로 빠져나갔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TDF 안전자산 제한과 퇴직연금 건보료 검토도 논란
정부가 TDF ETF를 퇴직연금 안전자산 할당분에서 투자할 수 없도록 막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도 논란의 중심에 있다. TDF ETF가 연금에서 위험자산 비중을 높이기 위한 우회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지적 때문인데, 투자자 선택권을 저해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현재 고용노동부·금융감독원은 TDF ETF를 적격 TDF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연말까지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시행세칙을 개정하는 것을 목표로 업계 의견을 수렴 중이다.
TDF는 은퇴 시점에 맞춰 주식·채권 비중을 자동 조정하는 퇴직연금 상품이다. 예컨대 은퇴가 한참 남은 청년기에는 성장주나 고수익 채권 등에 집중하고, 은퇴 시기가 가까워질수록 배당주나 국채 비중을 높이는 식이다. 연금 선진국인 미국은 퇴직연금(401K)에서 TDF에 투자하는 비중이 68%에 달할 정도로 일반화돼 있다.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편도 뜨거운 감자다. 현재는 퇴직연금에서 연금을 수령해도 건강보험료 산정 시 제외됐지만, 앞으로는 이를 포함하는 방안이 추진 중이다. 연금을 노후 생활비로 쓰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보험료 과세 대상 소득’으로 간주하겠다는 의미다.
은퇴자에게는 사실상 ‘이중 부담’이 될 수 있다. 퇴직연금 등 사적연금은 대부분 월급에서 세금과 건보료를 이미 뗀 후 남은 돈으로 납입하는 저축성 상품인데 여기에 다시 건보료를 매기는 것은 이중 부과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섣부른 건보료 부과가 노후 준비의 마지막 보루인 사적연금 시장 자체를 위축시켜 국민의 노후 불안을 가중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노후 준비 절실한 한국
문제는 이 같은 혼선이 한국 인구·재정 구조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이다. 특히 정부가 공적연금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세제 혜택까지 주며 사적연금 가입을 장려해놓고 이제 와 말을 바꾼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도 고령화 속도가 가장 빠르고, 노후 안전망인 국민연금 재정 고갈 시점이 앞당겨질 것이라는 전망도 끊이지 않고 있다.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국민연금을 내봤자 은퇴할 시기가 되면 받을 돈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결국 개인형 퇴직연금(IRP), 연금저축 등을 통해 개인이 직접 노후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 국민연금 전망을 보면 2030년부터 적자 구조가 불가피하다. 특히 2050년 총수입은 116조 5000억 원이지만, 지출은 322조 2000억 원으로 적자 규모가 205조 7000억 원에 달한다.
퇴직연금 아직은 실보다 득이 커
하지만 퇴직연금은 여전히 개인 자산 관리에서 중요한 축으로 평가된다. 제도 신뢰를 흔드는 조치들에 대한 비판 목소리도 중요하지만, 개인 입장에서는 세제 혜택과 장기 복리 효과가 여전히 크다. 퇴직연금(IRP, 연금저축)을 통해 투자하면 연간 최대 900만 원까지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고, 운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익은 과세가 이연된다.
일반 증권 계좌라면 배당소득세 15.4%를 내야 하지만 연금 계좌에서는 이를 재투자할 수 있어 복리 효과를 낼 수 있다. 또한 연금 형태로 수령할 경우 퇴직소득세가 연금소득세로 분리과세돼 세 부담이 대폭 낮아진다. 수령 단계에서 가입 기간이 만 5년 이상이고, 55세 이후 수령하는 등 요건을 맞추면 기타소득세율 16.5%보다 낮은 연금소득세율(3.3%~5.5%)로 분리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수익률도 좋다. 만약 연금저축펀드 계좌에 600만 원을 납입하고 20년 뒤인 2045년부터 연금을 수령한다고 가정할 때 세액공제 받은 99만 원을 다시 연금저축으로 납입해 매년 3%의 수익률을 낼 경우 일반 계좌에서 동일한 조건으로 운용했을 때보다 약 180만 원 더 많이 수령할 수 있다.
노후 준비, 결국 ‘정책 일관성’이 관건
핵심은 정책의 일관성이다. 정부가 노후 준비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도 정작 제도 운용에서 불합리한 규제나 추가 부담을 부과하면 투자자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퇴직연금 제도의 근본 취지를 고려할 때 지금 필요한 것은 안정성과 신뢰 회복이다. 퇴직연금은 한국사회가 직면한 저출산·고령화 위기 속에서 ‘최후의 안전판’이기 때문이다.
특히 제도가 불안정하면 안정적인 장기 투자 대신 단기 투자나 현금화 등이 있을 수 있고 이는 자본시장 안정성도 저해할 수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소비자 보호 장치도 중요하지만 운용 자유도 그만큼 중요한 요소”라며 “건보료 부과 문제도 사회적 합의를 거쳐 신중히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와 정치권 등은 국민이 안심하고 노후를 준비할 수 있게 제도의 신뢰성을 지켜줘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