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식 기자 pro@busan.com | 2025-09-12 15:40:02
금정산성은 우리나라 인공 산성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성벽 길이 18,845m 면적 8.2k㎡. 신라 시대부터 군데군데 돌무더기가 쌓여 성 외양을 갖췄다는 주장이 있지만, 현재 금정산성의 풍채는 조선 시대 숙종 시절부터 형성됐다는 게 정설이다. 부산항의 지리적 특성상 왜구나 왜군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한 것인데, 다행히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 뒤 치열한 전투가 없었고, 한국전쟁 때도 피해가 거의 없어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다.
금정산은 부산의 진산이자 전국적 명산이지만 고당봉을 타깃으로 삼은 산행이 주를 이룬다. 그러다 보니 산꾼들에게는 좀 더 전문성을 요하고 도전미를 주는 종주 산행 욕구가 생기기 마련이다.
한때 부산지역 해외 원정 산악회를 중심으로 나비바위 무명바위 등에서 암장 타기가 유행했다. 이를 떠올려 챌린지랍시고 석벽에 자일을 걸어 '도전하라'고 채근할 수도 없는 법. 금백(금정산~백양산) 종주라는 '하드 코어 코스'도 있지만, 거리만 약 28km에 달하는데다 소요 시간만 최소 10시간 이상 걸리다 보니 십수 년 산꾼들도 엄두조차 못 낸다.
다행히 금정산에는 성곽을 나란히 하는 길이 제법 있다. 이른바 '4대 성문 종주'. 북문의 소박함, 동문의 세련됨, 남문의 넉넉함, 서문의 당당함을 오롯이 즐긴다. 성문 하나하나를 도장 깨듯 지나면서 금정산의 시그니처 멧부리인 고당봉, 원효봉, 대륙봉, 파리봉을 오르는 짜릿함이 있다. 길이 약 18㎞, 8~9시간 걸린다. 성문 종주는 챌린지 대미를 장식하는 8코스 금백종주를 위한 담금질 구간이기도 하다.
성문 종주인 만큼 시점을 동서남북 성문 중 어디로 잡을지가 관건이다. 자가 차량이나 대중교통 접근성 측면에선 동문이 월등히 돋보인다. 다만 금정산의 동고서저 지형과 성문의 위치 따위를 고려할 때 전문가들은 서문에서 시작해 시계 방향으로 고당봉을 돌아 북문~동문~남문을 돌기를 권한다. 고당봉보다 조망이 더 뛰어나다는 파리봉~서문 구간은 다급한 내리막에다 등로마저 희미해, 서문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간다면 종주 초기부터 낭패감이 들 거라는 우려도 있다.
화명수목원에서 산성마을을 관통하는 산성로 왼쪽에 서문이 있다. 금정산성 4대 성문 중 유일하게 하천(대천)과 계곡을 끼고 있다. 레고 블록처럼 빈틈 없이 짜 맞춰진 석축에 망루(적대)도 세련됐고, 하천엔 아치형 수문이 있다. 예전에 해월사가 성문을 관리해 '해월문'으로 부른다. 4대 성문 중 제일 낮은 데 자리잡았지만 협곡 사이에 있어 적에게 쉽게 뚫리지 않을 것 같다.
서문에서 인증 사진을 찍고 북서쪽으로 길을 연다. 산길을 올라 왼쪽으로 나아가면 도원사로 닿는다. 금정구의 산성로 정비가 한창인지라 길을 잘 살펴야 한다. 암자 앞 성곽 정비 구간 아래로 길이 나 있다. 성곽을 따라 대천천 물소리를 듣고 걷다 보면 암문(暗門)이 나온다. 공식 성문 대신 몰래 드나드는 문이다. 적에게 포위되거나 아군한테 파발을 띄우거나 군사·물자 지원을 받을 때 쓰인다.
암문을 지나 장골봉(494m)까지는 나무 덱과 편한 길을 번갈아 밟는다. 경사가 점점 오른다 싶으면 장골봉이 나온다. 금정산성 제1건물터다. 무기 식량을 보관한 창고로 추정하는데, 일제 강점기 때부터 방치되어 훼손되었다.
장골봉에서 미륵봉까지 숲길을 지난다. 북문~동문~남문의 산행로보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주말에도 한적하다. 20여 분쯤 가면 미륵봉(712m)으로 붙는다. 조금 전까지 인색했던 조망이 여기서 단번에 해소된다. 고당봉과 한참 뒤에 만날 상계봉~파리봉 마루금이 아슴아슴 보인다.
미륵봉에서 경사를 느끼면서 오르면 고당봉 연결 덱이 나온다. 고당봉에서 인증 사진을 남기고 북문으로 내려간다. 세심정에서 물을 보충하고, 그 옆에 있는 '낙뢰 파손 고당봉 비석'을 보고 탐방지원센터 전시관에 들렀다. 고당봉을 자주 오가는 이도 전시관이 있다는 걸 모르거나 지나치기 일쑤다. 전시관에서 부산 산악인들의 도전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다. 희귀한 금정산 사진들도 있다.
북문에서 인증 등록을 마치고 원효봉~의상봉을 거쳐 제4망루로 이동한다. 4망루에서 동문까지는 샛길과 우회로가 곳곳에 있지만 동문 이정표만 따라가자. 금정산성의 여러 망루 중 경치가 가장 빼어나다는 제3망루를 들렸다 와도 된다. 동문에선 문을 나가지 말고, 남문 이정표를 보면서 성곽을 따르면 된다. 산성고개를 지나는 발아래로 자동차를 보면 남문으로 가는 것이다. 남문에서 대륙봉(520m)까지는 급히 높이가 오른다.
봉우리 이름은 1970년대 대륙산악회가 암벽타기 연습을 하던 암장 위에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게 다수설이다. 흔히 '평평바위'로도 불린다.
대륙봉에서 제2망루까지는 능선이 오르락내리락한다. 2망루는 처마와 바위가 붙다시피해 시야가 좁다. 인증 사진만 등록한다. 2망루에서 남문으로 가는 바윗덩어리 틈에 동제봉(540m) 표지석이 있다.
남문에서 성곽을 따라 난 길을 밟아도 되지만, 마실 물을 담으려 임도로 난 산길을 택한다. 남문에선 제1망루까지는 된비알이다. 성문 종주에 클라이맥스 단계이자 마지막 난관이라 생각하면 힘이 난다. 1망루는 석축만 있고 다른 망루처럼 건물은 없다. 여기서 챌린지 3코스 종점인 상계봉(640.2m)까지 갔다 오려면 20분 정도 걸린다.
파리봉(615m)의 '파리'는 순우리말로 유리 또는 수정. 불교에서 말하는 칠보의 하나로, 꼭대기가 수정처럼 빛난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조선 시대 이곳에 망미루가 설치돼 별장이 파견됐다는 뜻에서 파류봉(波留峰)이라고도 한다. 옛날 이 일대에 파리가 많아 봉 이름이 그리됐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산정을 살펴 보니 파리는 없고 칠보는 본 적이 없지만, 봉우리가 신비스럽고 바윗덩어리들이 범상치 않아 '파리설'보다 '칠보설'이 봉의 격에 부합하는 것 같다. 파리봉의 예사롭지 않은 멧부리에 누군가는 가야산 남산제일봉을 떠올리기도 한다. 고당봉에서 아슴아슴 보이던 서부산 낙동강 김해공항 일대가 여기선 더 뚜렷이 다가온다. 파리봉 전망대에서 망원경으로 보면 가덕도 부근도 관측된다.
파리봉에서 서문으로 내려가는 구간은 고도가 급격히 떨어진다. 예전엔 별도로 챙긴 로프가 없으면 내려갈 엄두를 못 낼 만큼 험했단다. 현재는 덱과 안전 밧줄이 설치됐지만 거친 내리막은 여전하다. 파리봉에서 수직으로 떨어질 듯 내려오다 화명동·금성동 갈림길 이정표를 만난다. 어느 쪽이든 하산으로 이어지지만 금성동 쪽이 길이 조금 더 훤하다. 곳곳에 둘레길과 길이 섞여 화명수목원 서문 방향을 가리키는 산행 안내 리본(시그널)을 참고하자. 여러 고문헌은 금정산을 "산정은 성채와 같고 산릉은 성곽과 같다"고 묘사한다. 4대 성문 종주는 이런 품평을 글이 아닌 몸으로 새기고 해석하며 도전하는 코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