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돈 기자 happyi@busan.com | 2025-09-04 15:09:56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가장 큰 변화라면 경쟁부문 신설을 들 수 있다. 서른 번째 축제를 맞는 BIFF가 과거를 돌아보고 새로운 30년을 내다보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고민한 결과 가장 앞세운 게 바로 경쟁부문의 도입이다. 다가올 30년의 출발점에서 내보이는 새 프로젝트인 만큼 준비를 많이 했다. 베를린과 칸, 베니스까지 유럽의 전통 있는 영화제에 버금갈 ‘아시아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BIFF의 경쟁부문 후보작 열네 편을 소개한다. 정한석 집행위원장은 “공인된 거장 작품부터 데뷔 감독 작품에 이르기까지 동시대 아시아 영화의 수작들을 모셨다”고 자신했다. 자, 이제 ‘부산 어워드’의 1호 주인공이 될 후보들을 만나보자. 수상작은 오는 26일 폐막식장에서 발표되며, 대상 수상작은 폐막작으로 상영된다. 14편 중 10편이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된다.
■임선애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
첫 장편 연출작 ‘69세’(2020)로 BIFF 뉴 커런츠 부문 관객상을 수상하고, 두 번째 작품 ‘세기말의 사랑’(2024)으로 다시 한번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된 감독의 세 번째 장편. 연인과 헤어진 이들이 모여 조찬모임을 함께하며 실연 기념품을 교환하고 이별 영화를 같이 보며 상실과 결핍의 퍼즐을 찾아가는 이야기. 수지, 이진욱, 유지태, 금새록 등 검증받은 배우들의 생생한 연기와 감독의 섬세한 연출이 실패한 이들의 심폐를 소생시키는 유려한 대중영화를 탄생시켰다는 평가다. 백영옥 작가의 동명 장편소설이 원작.
■나카타 고토 ‘어리석은 자는 누구인가’
‘러브레터’(1999)의 이와이 슌지 조감독 출신인 감독의 신작. 범죄와 연루된 세 인물이 펼친 사흘간의 도주극을 각자의 시점으로 그려낸 미스터리 서스펜스물이다.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2017), 넷플릭스 시리즈 ‘유유백서’(2023)에서 주연을 맡았던 기타무라 타쿠미와 아야노 고가 다시 호흡을 맞추고 신예 하타시 유타가 가세했다. 여성 감독 특유의 섬세한 연출이 더해져 청춘 성장담을 완성했다는 평가다. 박가언 수석 프로그래머는 “폭력이 현실에 깊숙이 침투한 대도시를 냉정하게 비추는 자화상”으로 소개했다.
■하산 나제르 ‘허락되지 않은’
“왜 배우가 되고 싶은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자유를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망명 중인 이란 출신 감독이 새 작품 촬영을 위해 고국으로 돌아오지만 촬영 허가를 받지 못한다. 그는 다음 세대의 목소리를 기록하기로 결심하고 사막 변두리에서 아이들을 카메라 앞에 세워 단출한 질문을 던지며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린다. 이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현실 인식론이자 동시에 영화에 관한 영화이다. ‘길 위의 영화’로 불리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방법론으로 현실과 영화 사이에 풍요로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이저벨 칼란다 ‘또 다른 탄생’
‘타지키스탄에서 도착한 한 편의 시와 같은 아름다운 영화.’(박선영 프로그래머) 산골 마을에서 살아가는 한 소녀의 이야기이다. 돌아오지 않은 아들을 그리며 간신히 삶을 잇는 할아버지, 외로운 삶 속에서 시들어 가는 엄마를 바라보며 갖게 되는 삶과 인생에 관한 질문을 아름다운 대사와 영상으로 그려낸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타지키스탄의 계곡을 배경으로, 군더더기 없이 설계된 조명과 정지된 이미지들 사이의 섬세한 긴장감이 영화의 시적 정서를 한층 배가시킨다는 평가다.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다.
■이제한 ‘다른 이름으로’
오랜 기간 홍상수 감독과 함께 일했던 감독의 세 번째 장편 연출작. 이 감독은 전작 ‘소피의 세계’(2022)와 ‘환희의 얼굴’(2024)이 BIFF에 연속으로 초청되면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이번 작품은 폐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후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려는 무명 감독과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감독은 ‘영화가 뭐길래’라고 책망하는 아내 몰래 작업을 진행하지만, 영화는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시나리오만 남은 상황으로 이어진다. 전작을 뛰어넘는 미학과 과감한 전개가 감동에 닿게 한다.
■시가야 다이스케 ‘고양이를 놓아줘’
2021년 단편 ‘창문’으로 BIFF 와이드 앵글에 초청됐던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 성공한 사진작가 아내와 불편한 감정으로 지내고 있는 음악가 모리. 한때 연인이었던 아사코를 우연히 재회하고 안부를 나누는 과정에서, 각자 더듬은 기억 속 서로 다른 과거를 마주한다. 과거의 미련과 향수, 사랑이 불러오는 감정과 파고, 시간에 대한 상대적 감각을 신인답지 않게 연출한 수작이다. 하마구치 류스케, 미야케 쇼, 이가라시 고헤이를 잇는 또 한 명의 일본 감독이 나타났다.
■한창록 ‘충충충’
“어쩌면 이 작품이 올해 영화제에서 논쟁과 논란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수수께끼 같은 제목은 영화 중간에 차례로 등장하는 세 개의 타이틀 ‘충(衝)동’ ‘충(衝)돌’ ‘충(衝)격’의 앞 세 글자를 하나로 모은 것이다.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고전적인 인물들이 출연하는 가운데 박진감 있는 서사가 전개되고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자유자재로 전개된다. 의도적으로 장치된 유치하고 거칠고 현란한 이미지들이 영화 내내 ‘날뛰’고 있다. 제목만큼이나 기이하고 도발적인 활기로 가득 찬 괴물 신인의 괴상한 데뷔작.
■유재인 ‘지우러 가는 길’
담임 선생님과 비밀 연애로 임신을 한 여고생이 꽁무니를 뺀 담임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 아이를 지우기로 하고, 이 불온한 여정에 룸메이트가 동행한다. 다만, 이 영화는 순수하고 낭만적인 학원물이나 윤리극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난장 속에서도 유머라는 숨구멍과 우정과 동행이라는 출구를 잃지 않고 마침내 결론에 이르는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