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형제들] 21·22번째 증언 "형제복지원 폐쇄 뒤 거리 떠돌다 정신병원에 20년 넘게 수용"

동생 손 잡고 "집에 가자... 집에 가자..."
매일 구타 당하다 정신이상자 된 누나
끌려온 아버지도 매맞고 갈비뼈 부러져
'짐승의 삶' 견디고 20년 만에 재회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2020-09-19 12:00:00

※편집자주-1987년 봄, 부산 사상구 주례동 백양산 자락. 육중한 담장 너머로 '형제복지원'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12년 동안 공식 사망자만 513명. 이후 33년이 지나서야 올해 5월,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작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부산일보>는 '살아남은 형제들-형제복지원 절규의 증언' 영상구술사 프로젝트를 통해 피해자들 기억 속 진실의 조각을 맞춰보려 한다. 33인의 목소리가 모여 33년 전 '한국판 아우슈비츠'의 실체를 밝히는 한 걸음, 수만 명 피해자의 아픔을 치유하는 다음 걸음으로 이어지길...('살아남은 형제들' 시리즈는 매주 토요일 연재됩니다.)


<간추린 이야기>

1984년 가을, 아버지 한영태(73) 씨는 학교를 다녀온 둘째딸 신애(47·당시 4학년) 씨와 막내아들 종선(44·당시 2학년·'살아남은 형제들' 20번째 증언자) 씨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시내 구경을 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라"는 말과 함께 동광파출소 앞에 남매를 남겨 둔 채 그는 발걸음을 돌렸다.

잠시 뒤 형제복지원 차량이 도착했고, 남매는 짐칸에 실렸다. "우리 아버지 저기 있어요!" 전봇대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 씨의 귓가에 9살 아들의 외침이 들리는 듯했다.

그때는 몰랐다. 자식들을 보낸 곳이 '지옥'인 줄.

2년 뒤, 한 씨가 집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동광파출소 순경이 찾아왔다. "서에 가서 잠깐 얘기 좀 하자"는 말에 따라 나섰고, 그길로 형제원으로 끌려 들어갔다.

'파란 추리닝'. 똑같은 옷을 입고 마주한 부자. 아들 종선 씨 눈에 반가움 대신 의아함과 실망, 분노가 비쳤다. 마음 속엔 '아버지를 어떻게 죽일까' 하는 생각이 똬리를 틀었다.

"신애는 잘 있나" 딸의 안부를 묻자 "신애 또라이 다 됐다" 아들의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아들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신애 씨는 정신병 환자가 돼 있었다.

세 살 터울 동생과 함께 형제복지원에 들어온 열두 살 소녀 신애 씨. 입소하자마자 소대가 나뉘어 '단짝 남매'는 생이별을 해야 했다.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엄마처럼 각별히 막내를 챙겼던 신애 씨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동생은 키가 작았다. 운동장에 집합을 하면, 맨 앞줄에 선 옆 소대 동생이 눈에 들어왔다. 자석에 끌리듯 동생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끌었다. "종선아 집에 가자".

동생은 겁에 질려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 걸음이라도 움직였다간 매타작이 쏟아질 터였다.

어김없이 시작된 조장들의 구타. 맞으면서 끌려가는 누나의 모습을 종선 씨는 울먹이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누나의 '일탈'과 '구타'. "야 이 씨발년아!" 어느 날 조장이 신애 씨에게 외치더니, 동생 종선 씨에게 따라하라고 했다.

동생은 살기 위해 누나에게 외쳤다. "야 이 씨발년아! 다시는 찾아오지 마!"

23·24소대, 25·27소대... 소대를 옮길 때에도 사이좋게 옆 소대로 배치된 남매. 먼 발치에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만큼 고통스러운 장면도 마주해야 했다.

"니 누나 어제 따먹혔다더라... 누구한테 당했다더라..." 동생은 누나가 점점 정신이상자로 변해, 결국 정신병동으로 옮겨지는 과정을 지켜봤다.

1987년 봄 형제복지원 폐쇄 결정이 내려지면서 한 씨와 딸 신애 씨는 사회로, 아들 종선 씨는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1989년 정신병원에 수용될 때까지 한 씨와 신애 씨는 거리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다. 신애 씨는 무려 28년 가까이 정신병원 한 곳에서 생활했다.

아들 종선 씨는 2007년 자살을 시도하려다 기초생활수급 제도를 알게 돼 동사무소를 찾았다. 수급 신청 과정에서 '부양의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주소를 따라 찾아간 곳은 언양과 부산의 정신병원. 아버지와 아들, 누나와 동생은 20년 만에 재회했다.

2015년 부녀는 아들 덕분에 좀 더 여건이 괜찮은 정신병원으로 함께 옮겼다. 말문이 트였고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요구할 정도로 상태가 나아졌다.

세 가족이 한집에서 사는 '그날'. 이들의 삶을 지탱하는 '꿈'이다.

*정신병원에 있는 아버지(한영태)와 작은누나(한신애)를 대신해 한종선('살아남은 형제들' 20번째 증언자) 씨의 기억을 바탕으로 두 분(21·22번째 증언자)의 이야기를 재구성했습니다.

아버지 한영태(왼쪽) 씨와 작은누나 한신애 씨. 한종선 제공 아버지 한영태(왼쪽) 씨와 작은누나 한신애 씨. 한종선 제공

<더 많은 이야기>

■ "씨발년아!" 누나한테 욕설을…

(형제복지원에) 도착했을 때가 아마 밤 11시쯤 됐던 거 같아요. 신입소대를 거치지 않고 바로 본방으로 가게 된 거거든요.

나는 24소대... 누나는 23소대. 아버지가 직접 맡겼기 때문에... 우리는 보호자가 찾아올 이유가 없기 때문에 신입소대에서 대기할 기간이 필요 없었던 거죠.

우리 누나가 맨날 소대 이탈을 해갖고 나를 데리고 "집으로 가자"고 막... 단체 행동에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위들을 한 거잖아요.

내가 맨 앞열에 있잖아요. 그러니까 누나가 소대를 이탈을 해서 나한테 오는 거예요. 무조건. 그러고 내 손 잡고 "집에 가자"고 막 하는 거예요.

근데 나는 이거 움직이면 죽는다는 걸 알잖아요. 그러니까 누나 뜻에 따르질 못하는 거예요.

그 상황에서 이제 누나가 조장들한테 끌려가면서 맞고 하는 걸 내가 눈으로 목격했던 거...

하루도 안 빠지고 와가지고 두들겨 맞으면서도 계속 오는 거예요. 이제 한번은 우리 조장이 (누나한테) 손가락질하면서 "야 이 씨발년아!" 이런 거예요.

(나한테) 따라하라는 거예요. 그래 나도 따라했죠 "야 이 씨발년아!"

"다시는 찾아오지 마!" 똑같이 따라했죠. 누나에 대한 죄책감이지. 나는... 내가 살자고 누나한테 그런 말까지 한 거니까.

'짐승 같은 삶에서 인간으로 돌아가려 한다'라는 이야기가 여기서 나오는 거예요. 나는 이런 식으로 말살 당했지만 다른 인격들은 또 다르게 말살 당했을 거 아닙니까.

85년도 때 나는 27소대 갈 때 누나는 25소대로 가고. 계속 내 옆 소대로 같이 있다가 정신이상이 돼가는 과정을 내가 다 목격하면서 산 거지.

완전히 안 보이는 곳에서 있었더라면 내가 누나에 대한 존재 자체를 망각했을 건데. 3년 6개월 내내 누나가 내 옆에 있으면서 내가 그걸 다 목격하다 보니까... 잊을 수가 없는 거죠.

공포 분위기 안에서 서로를 바라본다는 그 감정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서로 간에. 의지가 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게 더 괴로움으로 다가오는 거죠.

식당 앞에서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는 아동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식당 앞에서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는 아동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남매 맡기고 얼마 뒤 잡혀온 아버지

23소대에 있는 누나들이라고 해야 되지. 소대원들. 대놓고 이제 약 올리는 거지. 나한테. "니 누나 어저께 뭐 당했다더라... 누구한테 따먹혔다더라..."

말 안 듣는 소대원들한테 강제로 먹이는 CP제라고 있어요. 정신과 약... 그거 먹으면 바보가 돼버려요. 사람이 진짜로.

운동장에서 '에~' 하고 그냥 햇볕만 보고 멍때리는 사람이 돼버려요. 결국 우리 누나가 그 약까지 계속 복용하는 걸 내가 목격했고.

86년도에 누나는 C동으로 이제 강제 감금당하고 정신병동으로... 그러면서 누나랑도 완전히 못 보게 됐고.

식당에서 간간이 한 번씩 봤죠. 지금도 누나가 식탐에 대한 욕심이 되게 강해요. 어렸을 때 원체 못 먹다 보니까 먹을 수 있을 때만 먹어야 된다는 기억...

(면회 갈 때) 간식 같은 걸 내가 사 주잖아요. 몰래 일어나갖고 그걸 다 먹어버려요.

식당 앞에서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는 아동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식당 앞에서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는 아동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1986년도 어느 날 운동장에서) 4열종대로 서가지고 있는데 경비 아저씨가 온 거예요. "니가 영태 아들이야? 야 너거 아버지 왔다" 이러는 거예요. '와 집에 갈 수 있다'.

신관 C동 쪽으로 제가 가가지고 아버지를 봤죠. 똑같은 (형제원) 추리닝을 입고 있는 거예요. '이건 뭔가 잘못됐다'. 그때부터 이제 '아버지를 어떻게 죽일까' 이런 생각만 하고 있었지. 원망이 차 가지고.

내 기억 속에는 '진짜 형편없는 아버지였다'라는 기억밖에 안 나는 거지. 우리를 데리러 온 것도 아니고 자기가 잡혀 왔으니까.

형제복지원이 폐쇄될 때 나는 다른 고아원으로 넘어갔고. 아버지는 어른이라서 사회로... 누나는 미성년자 맞지. 16살 정도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사회로 나간 거지. 정신병동에 있었으니까.

아버지하고 누나 말을 들어보면 87년도 때 나와서 89년도 때까지 부산 곳곳을 이렇게 돌아댕기다가... 그냥 돌아댕겼대요. 부산...

정확하게 어디를 어떻게 돌아댕겼다는 이야기는 자세히 없고. 행려환자로 경찰 손에 다시 잡혀서 정신병원에 들어갔었다고 했으니까.

누나는 연산 정신병원에서 무려 28년 가까이 있었던 거고. 아버지는 대남병원 뭐 여러가지 기타 등등의 병원을 돌아댕기다가 울산에 언양 정신병원... 거기서 이제 내가 찾게 된 거고.

한신애·종선 남매가 형제복지원에 끌려갈 당시 상황. 한종선 그림 한신애·종선 남매가 형제복지원에 끌려갈 당시 상황. 한종선 그림

■ 아버지 죽이려다 용서한 아들

(2007년에 자살 시도를 하려다가) 기초생활수급자 한번 동사무소 가서 신청해보라. 그래 동사무소에 갔더니 부양의무자라고 하는 거예요. 갑자기.

그 주소대로 이제 찾아갔죠. 언양하고 연산 정신병원...

(아버지한테) 나(아들)라는 신분을 속이고 일단 아버지를 면회를 했죠. 아버지는 나를 못 알아봤고. 나는 아버지를 알아봤으니까.

그때 내가 칼을 차고 가긴 했었거든요. 진짜 아버지 죽이려고.

"자식을 형제복지원에 보낸 거 기억하냐" 하니까 "기억한다. 그때는 그럴 상황밖에 안 됐었다... 힘들었다."

"그 형제복지원이 살 만한 곳입니까"라고 물어봤을 때 "뭐 괜찮았다... 좋았다" 뭐 이런 식으로 얘기했으면 그 자리에서 죽였을 거예요. 진짜로.

근데 아버지가 "거기는 사람 살 곳이 아니었다. 많이 맞아가지고 갈비뼈도 부러졌고 막 이랬었다."

그런 곳에 자식들 맡긴 것에 대해서 미안해하거나 죄책감 같은 게 있었어요.

나라도 그러지 않았을까. 누군가가 공무원들이 와가지고 국가가 애들 관리하고 먹여주고 공부 가르쳐준다고 하는데. '나라도 맡기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라.

"당신 앞에 있는 제가 누구로 보이시냐"고 하니까 국가공무원 아니냐고. 자기를 감시하려고 보낸 사람 아니냐고 이러는 거예요.

당신 아들 '한종선'이라고. 그러니깐 아버지가 눈이 갑자기 '반짝' 하는 거라. 순간적으로 딱 이렇게 쳐다보더니 갑자기 눈을 탁 내리까는 거예요.

그다음부터는 말을 한마디도 안 하는 거예요. 무려 거의 한 3년 가까이를 말을 안 했어요. 그 정도로 죄책감에 시달렸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한테 "다음에 다시 면회 올게. 조금만 참고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이 말이 84년도 때 아버지가 했던 말이잖아요. "종선아 조금만 기다려라. 아버지 좀 갔다 올게."

내가 그 말을 했던 거죠. 나도 모르게...

용서가 되는 거예요. 이 원망이 다 사라지는 건 아닌데 이해는 되는 거니까. 그러고 나서 그 칼을 이제 버린 거죠.

부산으로 바로 또 내려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거기도 정신병원인 거라.

누나 모습을 전혀 못 알아보겠는 거예요. 되게 이뻤었거든요? 내 기억 상으로는. 진짜 뭐 아줌마가 다 되어 있으니까.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까 양말부터 벗겨버린 거예요. 발등에 화상 자국이 있으니까. 어릴 때 기억에...

그래갖고 누나를 인정하고. 그래 이제 형제복지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탁 던져 봤더니 한 두 문장 정도 하다가 "면회 그만하자" 이러는 거예요.

동생 한종선(왼쪽) 씨와 작은누나 한신애 씨. 한종선 제공 동생 한종선(왼쪽) 씨와 작은누나 한신애 씨. 한종선 제공
세 가족의 꿈은 한집에서 모여 사는 것이다. 한종선 그림 세 가족의 꿈은 한집에서 모여 사는 것이다. 한종선 그림

■ 형제원 이어 정신병원서도 '성폭행'

아버지랑 누나랑 특이한 점이 뭐냐면 형제복지원 이야기만 탁 하면 짧게 잠깐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못하게 해버려요. "그만해라".

'PD수첩'하고 면회를 했을 때 그 이후로 아버지가 짧게 한 3~4개월 동안 말 한마디도 안 했던 적도 있어요.

이성적으로 이렇게 멀쩡해 보이는 나조차도 이런 이야기를 하면 괴로운데. 아버지랑 누나 입장에서는 그게 더 실감으로 다가올 수 있거든요. 쉽게 접근을 못 하는 거예요. 그 이야기만큼은...

"왜 형제복지원에 들어갔었냐" (아버지께) 그 이야기를 하니까 "집에서 TV 보고 있는데 파출소 순경이 나오라고 했다"는 거예요. "서에 가서 이야기 좀 합시다" 하면서 차에 실어 놓고 형제복지원에 보냈다는 거예요.

누나한테 내가 물어봤거든. 형제복지원 안에서 당했었던 거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볼 겸 해갖고 "니 빠구리(섹스) 알제?" 라고 이렇게 딱 던졌는데 "안다" 이러는 거예요.

"니가 그걸 어떻게 아노?" 이렇게 물어봤는데 "여기 병원에서 당했다" 이러는 거예요. 남자 그 환자들이 여자 환자들을 강제 성폭행 같은 걸 한다더라고요.

형제복지원에 있을 때 당했다는 거는 내가 소대원들한테 들어서 아는데. 그 이후에 삶은 누나가 계속 시설 안에만 있었던 사람인데. 그런 경험을 어떻게 당했는지 난 그게 알 수가 없었단 말이지. "정신병원 안에서 당했다"라고 이야기를 하더라고.

아버지랑 누나가 저를 인정한 지가 몇 년 안 돼요 이제. 5~6년 정도 됐겠다.

"쟈는 내 아들 아이다" "쟈는 내 동생 아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요.

자기들 기억 속에 있는 아홉 살짜리 코찔찔이여야 되는데 "저렇게 다 큰 아이가 어떻게 내 아들이냐"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죠.

2015년쯤에... 조금 더 환자 중심으로 하는 병원들이 있긴 있더라고. 옮기고 나서 누나랑 아버지가 말문이 트이기 시작한 거예요.

자기 권리 주장 같은 거를 좀 하기 시작하죠. 이제는...

"면회 언제 오노?"에서부터 "간식 뭐 갖고 오노?" 이거 사 달라... 저거 사 달라...

이런 욕구가 생겼다라는 거 자체가 난 긍정적으로 보고 있거든요. 살아 보겠다고... 빠져나오겠다라는 소리잖아요.

그래서 난 긍정적으로 봐요.

이대진 기자 djrhee@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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