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은 비움의 공간, 욕망 채우면 철학이 사라져”
사진작가·불교 인문학자 노재학 씨
일 년 365일 중 300일 밖으로 다녀
작년 독일 수도원서 단청 주제 사진전
비례미 탁월 단청 세상에 더 알려지길
“자신 철학 담아 당호 써 붙여 보시라”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 2025-05-30 09:00:00
노재학 사진작가가 지난 15일 영광도서에서 ‘오래된 아버지의 집, 한국의 고택’ 을 주제로 시민특강을 하고 있다. 박종호 기자
일 년 365일 중 300일을 밖으로 나다니는 사람이 있다. 그는 지난 30년간 전국의 전통 사찰과 궁궐, 고택, 고목 사이를 거미줄처럼 잇고 다녔다고 했다. 통도사에는 1000번도 넘게 갔고, 그래서 부처님이 자기 발걸음 소리를 알 것이라고 말했다. 한번은 방송에 나와 자신이 지구와 함께 자전 중이라는 이상하고도 당연한 이야기를 했다. 지난해 11월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단청(丹靑)’을 주제로 한국 문화 전시회를 열었던 노재학 사진작가 이야기다. 어떻게 유럽의 가톨릭 수도원에서 한국 불교 단청 전시가 열렸는지 궁금해진다.
먼저 그가 쓴 두꺼운 책 <한국 산사의 단청 세계>, <한국의 단청 1>, <산사 명작>을 살폈다. 사진작가라기보다 불교 인문학자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사진을 찍기 위해 절집으로 향할 때 단 한 번도 정장 차림이 아닌 적이 없었다고 했다. 절집은 부처에게 가는 길이기에 예의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단청은 목조 건물에 오방색으로 칠해진 장식이다. 그는 주로 절집 ‘천정(‘하늘의 우물’이란 뜻으로 천장 대신 이 표현을 강조했다)’의 단청 문양을 찍는다고 했다. 한 번도 사진을 배운 적이 없다니 어떤 사정으로 사진작가의 길을 가게 되었는지도 궁금해졌다.
전남 구례 운조루의 사랑채 누마루. 노재학 제공
지난 15일 부산 서면 영광도서에서 인문학당 큰수레(회장 최복룡) 주최로 열린 ‘오래된 아버지의 집, 한국의 고택’ 시민특강에 선 그를 만나러 갔다. 그의 사진에서 고택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5월부터 여름까지의 푸르름 속에서 고택은 아름다워진다. “비가 오면 고택에 가라”는 말은 시의 한 구절 같았다. 노재학 작가는 부산진구 부암동에 있는 자기 집 이름이 ‘학락재(學樂齋)’라고 소개했다. ‘학이시습지 (學而時習之)’와 ‘불역낙호(不亦樂乎)’에서 한 글자씩 따와서 지은 것이다. 글자 순서를 바꾸면 ‘재학이와의 즐거움’이란 뜻도 된단다. 이런 식의 집 이름이 당호(堂號)다. 그는 이날 모인 사람들 중에서 자기 집 이름을 가지고 있는 분, 손 들어보라고 했다. 캐슬(Castle)이나 팰리스(Palace) 같은 아파트 이름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무도 없었다. 하긴 사람의 호도 없는 세상에 집의 호가 있을 리가 없다.
보기 드물게 온돌방이 꾸며진 경북 김천의 방초정. 노재학 제공
그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살던 고택은 비움과 여백의 공간이었는데, 아파트로 인해 집이 마구 채우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고 아쉬워했다. 예전에 사람들은 건축물에다 자기가 생각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이름을 붙였다. 경주 양동마을의 서백당(書百堂)은 참을 인(忍) 자를 하루에 100번씩 쓴다는 의미를 담았다. 함양 ‘일두고택’은 자신은 한 마리 좀벌레에 불과하다는 통렬한 반성을 담았다. 경주 독락당(獨樂堂)은 세상으로부터 나를 감추어 혼자 사색을 즐기겠다는 뜻이다. 전 재산을 털어 지금의 영남대를 세운 경주 최씨 고택에는 ‘둔차(鈍次)’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자신은 둔하고 이류’라는 말이 큰 울림을 준다.
하지만 집이 욕망을 채우는 곳이 되면서 자신만의 철학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사람이 집을 짓지만, 집은 사람을 길러내는 곳이 아닌가. 폐쇄적인 아파트에서 제대로 된 나를 기를 수가 없는 법이다. 그는 집에 돌아가면 고민해서 당호를 하나 지어서 써 붙이라고 조언했다. 어떤 이름이 좋을까 생각하다 보니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특강 전에 잠깐 인터뷰를 하고 이후 몇 번 연락했다. 그때마다 서로 다른 지역에 있었으니, 정말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분이었다.
노재학 사진작가가 양산 통도사에서 천정 단청을 찍고 있다. 노재학 제공
-일 년 중 300일을 밖으로 나다닌다고 해서 당연히 가족이 없는 줄 알았다.
“옆에서 잔소리 안 하고 알아서 떨어져 나가 있다가 어쩌다 한 번씩 오니 어찌 보면 아주 훌륭한 남편 아닌가. 나는 부산대 수학교육과 82학번으로 캠퍼스 커플이었다. 교사인 아내는 방학 때면 항상 같이 다니며 반사판을 들어주거나 기록을 맡아서 해 준다. 딸은 홍익대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단청을 가르친다. 사위는 불화를 그리고 있다. 두 사람은 통도사 불화반에서 만났으니 이 또한 인연인 듯 싶다. 내가 2017년 통도사에서 달력용 사진 작업할 때 뒷모습을 사위가 찍었는데, 마음에 들어 지금도 프로필 사진으로 쓰고 있다.”
-어떻게 독일 수도원에서 단청을 주제로 한 전시회를 열게 되었나.
“상트 오틸리엔은 한국과 굉장히 깊은 인연을 가진 수도원이다. 2005년에는 국보급인 겸재 정선 화첩을 우리에게 영구 대여 방식으로 반환하기도 했다. 수도원의 초대 원장인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는 1911년과 1925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에 와서 한국의 생활 풍습과 단청 등을 찍어 1시간짜리 다큐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만들었다. 이 신부님이 한국에 다녀간 지 100주년 기념으로 한국의 단청을 주제로 한 저의 사진전을 열게 된 것이다.
부산 범어사의 대웅전. 노재학 제공
-학생운동으로 1년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고 들었다.
“1989년 국가보안법 위반 조직사건으로 서울 구치소에 들어갔다가 안양교도소를 거쳐 마지막에 제주교도소로 갔다. 안양교도소에서는 임수경 방북 사건으로 들어와 있던 문익환 목사와 만나 많이 소통했다. 당시 맞은 편 병동에 수감된 문 목사와 운동 시간에 만나 매일 대화를 나눴다. 우리는 나가면 지리산 산악회라도 조직하자고 했다. 그런데 거기서 단식 투쟁을 하면서 내가 옥중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가 보복성으로 제주교도소로 보내졌다.
-고생이 많았을 것 같다. 제주교도소에서의 생활은 어땠는가.
“제주교도소는 한라산 자락 해발 300m 위치에 있었다. 0.75평에 4중 창살의 방이었다. 목장에서 나는 소 울음소리만이 유일하게 자유를 느끼게 해 주던 곳이다. 사방에서 구더기가 나와서 돌아다니다 죽은 번데기가 겹겹이 쌓였다. 한 달 있으니까 냄새가 지독해서 정신병이 오려고 했다. 그때 창살 밖의 칸나꽃을 만났다. 키가 큰 칸나의 붉은 꽃과 초록의 잎이 주는 느낌이 강렬했다. 개미가 칸나꽃을 타고 올라가는 모습에서 경이로움을, 생명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경험이 사진작가가 된 계기가 되었나.
“결정적이었다.”
그는 1991년 출소한 뒤 마음을 다스리려 전국의 들판을 쏘다니다가 폐사지에 빠지게 된다. 그 뒤 석탑, 마애불, 석등, 고목, 창호로 관심이 이어지다 꽃살문을 열고 사찰 법당의 천정 단청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강단의 스승도 없었지만 집 밖이 학교이자 수행장이었다. 사진 작업을 하지 않는 날에는 도서관에 가서 불교경전, 건축, 미술사학 등의 자료를 찾고 공부했다. 산사에서 단청으로 공부가 점점 깊어졌다.
양산 통도사의 대웅전 천정 단청. 노재학 제공
-어떻게 단청에 빠지게 되었나. 단청이 그렇게 의미 있는 것인지 몰랐다.
“우연히 경복궁 근정전의 천정을 올려다보았는데 거기에는 완벽하게 좌우 대칭된 프랙털(Fractal) 도형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부분이 전체에, 전체가 한 부분에 있었다. 크기는 달라도 반복되는, 자기 유사의 반복 세계였다. 수학에서는 비례가 중요한데 그 비례의 미감이 탁월했다. 한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에 한국 궁궐의 단청이 잠깐 소개되며 외국인들도 단청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단청은 고구려 고분 벽화, 고려 불화를 잇고 민화로 계승됐다. 우리의 단청이 세계적으로 더욱 알려져 화가나 디자이너에게 새로운 모티프와 영감을 제공하고, 감명을 불러일으키길 바란다.”
부산 범어사 팔상 독성 나한전 천정. 노재학 제공
- 범어사와 통도사는 부산 사람들에게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그 가치를 잘 모르는 것 같다.
“통도사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질서와 자유분방함을 뜻하는 예악(禮樂)이 종합화되어 있는 곳이다. 다른 사찰은 200~300년 된 불교 미술의 단청이 한두 곳에 불과하지만 통도사는 11곳이나 남아 있다. 통도사는 벽화의 보고, 불교 미술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통도사에 버금가는 곳이 범어사다. 통도사 11곳 단청을 압축하면 범어사 단청을 만들 수 있다. 불교의 극락세계를 표현하는 장엄 (莊嚴) 미술은 고구려에서 시작해 경기와 충청을 거쳐 경북과 전남 지역에서 꽃을 피웠다. 경북은 고전주의, 전남은 낭만주의 경향이 뚜렷하다. 통도사 장엄미술은 그 두 흐름을 종합적으로 집대성하고 있다. 범어사 대웅전 단청은 고전주의, 팔상전 단청은 낭만주의 양식의 정수를 보여 준다.”
동해 삼화사 적광전 처마의 단청. 노재학 제공
수많은 사진 속 이야기 중에 뒤늦게 한 토막이 생각났다. “고택에 가면 방문 고리에 자물쇠 대신 걸려 있는 게 있다. 때로는 숟가락, 때로는 나무토막을 꽂아 둔다. 사람들이 그걸 무시하거나 쑥 빼서 훔쳐 가도 되지만 그렇게 안 한다. 문이 닫혀 있으니 열지 말라는 메시지를 우리가 공유하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정말 선하고 위대하지 않나?” 알고 보면 달리 보인다더니, 잠이 들기 전 쳐다본 아파트 천장이 예전 같지 않았다. 우리는 눈앞의 물질적 이익에만 치우쳐 정말 중요한 가치를 잊고 사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