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 | 2026-10-28 11:12:49
부산 출신 현대미술가 안창홍 작가가 미국 워싱턴 D.C. 아메리칸대학교 미술관(캇첸아트센터)에서 생애 첫 미국 미술관 개인전 ‘안창홍: 눈물(noon-mool)’을 열고 있다. 사진은 지난달 5일 개막식 당일 전시장 모습. 오른쪽 작품이 '박제' 연작 중 하나이다. KEA재단 제공
워싱턴 D.C. 아메리칸대학교 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안창홍 작가가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작가 제공
지난달 4일 열린 프리뷰 파티에서 전시 주인공인 안창홍 작가, 공동 큐레이터 문범강 조지타운대학교 교수와 잭 라스무센 아메리칸대학교 미술관 관장(왼쪽부터). KEA재단 제공
부산 출신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독보적인 거장 안창홍(73) 작가가 미국 워싱턴 D.C. 아메리칸대학교 미술관(캇첸아트센터)에서 생애 첫 미국 미술관 개인전 ‘안창홍: 눈물(noon-mool)’을 열고 있다. 지난 9월 5일 개막해 12월 6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는 미술관 2개 층에 걸쳐 1970년대 초기작부터 최근 ‘박제(Taxidermy)’ 연작까지 약 97점을 선보인다.
개막식을 마치고 귀국한 안 작가를 부산 KEA재단에서 30일까지 열리는 특별 소장품전 ‘안창홍, 영혼의 꽃’ 전시장에서 만났다. 대형 상업 후원이나 광고 없이 작품의 힘만으로 미국 수도의 미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그의 소감과 예술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워싱턴 D.C. 아메리칸대학교 미술관(캇첸아트센터) 외부 전경. 작가 제공
워싱턴 D.C. 아메리칸대학교 미술관에서 개막한 ‘안창홍: 눈물’ 전시 전경. 작가 제공
■워싱턴이 주목한 ‘눈물’
이번 전시는 미국 예술 매체 <하이퍼알러직>이 선정한 ‘올가을 워싱턴 D.C.에서 꼭 봐야 할 10개 전시’에 포함됐고, <이스트 시티 아트>는 이를 이번 가을 시즌을 이끄는 대표 전시로 소개했다. <워싱턴포스트>도 지역 주요 전시 목록에 이번 개인전을 실었다.
안 작가는 “국제전이 끊이지 않는 워싱턴에서 한국에서 조용히 준비한 전시가 10대 전시로 꼽힌 것은 작품 내용만으로 인정받은 일”이라며 “대규모 자본과 광고를 앞세운 전시가 아니라 순수하게 작품으로 평가받았다는 점이 가장 뜻깊다”고 말했다.
전시 제목을 영어 ‘티어스’(tears)가 아닌 한국어 발음 ‘눈물(noon-mool)’로 쓴 것도 의도적이다. 그는 “사전적 의미보다 한국어 ‘눈물’이 지닌 정서적 뉘앙스가 내 그림과 더 깊이 맞닿아 있다”며 “영어권에서도 우리말 제목을 그대로 쓰자고 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는 원래 데이비드 호크니와 미술관의 각 층을 나눠 선보일 예정이었다. 호크니 전시가 연기되면서 안 작가의 전시는 미술관 두 개 층을 모두 사용하게 됐고, 한 작가의 50년 작업 세계를 조망하는 회고적 대규모 개인전으로 완성됐다.
안 작가는 “처음에는 ‘박제’ 연작으로 한 층을 채우려 했다”며 “두 층을 쓰게 되니 70년대 그림부터 최근 작업까지 연도별로 발자취를 보여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전시에는 수집가들이 빌려준 1970년대 작품 20여 점과 ‘박제’ ‘유령 패션’ ‘베드 카우치’ 등 최근 연작과 신작이 함께 전시됐다.
전시의 중심인 ‘박제’ 연작은 박제된 동물의 대형 사진 위에 물감을 겹겹이 쌓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생명을 잃었지만, 관람자를 응시하는 듯한 동물의 형상은 죽음과 기억, 인간의 폭력과 생명의 취약성을 떠올리게 한다. 전시를 관통하는 문구는 ‘잊힌 존재들이 다시 우리를 바라볼 때’다.
잭 라스무센 아메리칸대학교 미술관 관장은 안창홍의 작업이 “역사가 어떻게 기억되는지,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트라우마가 어떻게 기념되고 소비되는지”를 성찰하게 한다고 평했다. 그는 미술관이 쉬운 결론을 주기보다 관객이 불편함과 불확실성 속에서 깊은 의미를 발견하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워싱턴 D.C. 아메리칸대학교 미술관에서 개막한 ‘안창홍: 눈물’ 전시 전경. 작가 제공
워싱턴 D.C. 아메리칸대학교 미술관에서 개막한 ‘안창홍: 눈물’ 전시 전경. 작가 제공
■“그림으로 경종을 울리고 싶다”
안 작가의 작업은 한국의 역사와 사회적 모순에 뿌리를 두면서도 폭력·기억·죽음·생명이라는 보편적 질문으로 확장된다. 그는 자신을 민중미술의 한 갈래로만 규정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는 “나는 민중미술 쪽에서도 이단이다. 정치색이 짙어지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는 문제를 끝없이 지적해 왔다”며 “급류 속에서 한 사람이 제자리를 지키려 하면 거꾸로 가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회화는 장식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과 마주하는 행위다. 안 작가는 “그림을 통해 삶을 깨우치고, 경종을 울리고, 아픈 것을 같이 아파하고 싶다”며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사회의 몫이지만, 작가로서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는 일은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술관이 ‘잘 팔리는 그림’만 전시하는 현실에도 비판적이다. “미술관이 기능을 못 하면 불편한 작품은 미술관 안으로 들어갈 자리를 잃는다”는 것이다. ‘아마란스’와 ‘맨드라미’ 연작은 자신의 생계를 이어주는 그림이지만, 동시에 야생의 꽃이 지닌 원초적 생명력을 그린 작업이기도 하다.
부산 해운대구 KEA재단에서 30일까지 열리는 특별 소장품전 ‘안창홍, 영혼의 꽃’ 전시장에서 만난 안창홍 작가. 김은영 기자
안 작가는 1989년 부산을 떠나 경기도 양평으로 작업 기반을 옮겼다. 그는 “부산에 있었으면 지역 작가로 남았을지 모른다”며 “당시에는 여기서 말라 죽겠다고 생각해 떠났지만, 마음은 늘 부산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밖에 있어도 사람들은 나를 부산 작가로 이야기한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부산에서의 대규모 개인전은 2017년 조현화랑 ‘눈먼 자들’과 2009년 부산시립미술관 ‘안창홍: 시대의 초상’ 이후 오랜만에 이어졌다. 이번 미국 전시를 앞두고 부산 KEA재단에서 열린 ‘안창홍, 영혼의 꽃’은 그의 작업 세계를 고향에서 다시 만나는 계기가 됐다. 안 작가는 “부산에 작업실을 하나 더 만들고 싶다”고도 밝혔다.
워싱턴 D.C. 아메리칸대학교 미술관에서 개막한 ‘안창홍: 눈물’ 전시를 한 관람객이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KEA재단 제공
워싱턴 D.C. 아메리칸대학교 미술관에서 개막한 ‘안창홍: 눈물’ 전시 전경. 작가 제공
■미국 첫 미술관 개인전의 의미
이번 전시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예술경영지원센터의 지원, 사비나미술관 협력으로 마련됐다. 안 작가는 “국제전은 대개 자본의 힘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그럼에도 적은 예산으로, 광고 없이 작품 내용만으로 알려졌다는 점이 이번 전시의 가장 큰 의미”라고 강조했다.
단색화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국제적 흐름 속에서, 형상미술과 민중미술의 계보를 잇는 안창홍이 미국 미술관의 두 개 층을 통째로 채웠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신호다. 그의 작업은 한국의 비극적 역사에서 출발하지만, 워싱턴의 관객에게는 폭력과 기억, 생명의 취약성이라는 모두가 마주하는 질문으로 다가가고 있다.
11월 서울 아라리오갤러리 전시에서 선보일 높이 3m, 무게 1100㎏에 이르는 무쇠 조각 ‘눈먼 자들’ 시리즈 가운데 하나를 옮기고 있다. 작가 페이스북 영상 캡처
오는 11월 4일부터 12월 26일까지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개최할 ‘지상낙원’ 전시 포스터.
안 작가는 오는 11월 4일부터 12월 26일까지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신작전 ‘지상낙원’을 연다. 제목은 반어적이다. 그는 “지구가 실험하고 있는 여러 고통을 ‘지상낙원’이라는 이름으로 뒤집어 보려 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높이 3m, 무게 1100㎏에 이르는 무쇠 조각 ‘눈먼 자들’ 시리즈가 주요 작품으로 선보인다. 전시장 입구 벽을 뚫고 들어가야 할 만큼 거대한 규모의 이 작품은 전쟁 희생자에 대한 애도이자, 탐욕과 자본이 만들어낸 자멸적 폭력에 대한 반추에서 출발했다. 안 작가는 “폭력이 관념화되고 소비재처럼 소비되는 이 시대의 현실을 기록해 두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도 회화를 넘어 조형·사진·영상으로 영역을 넓히며 생명과 폭력의 문제를 계속 파고들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