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여성들의 참정권 요구가 거세진 것은 19세기.
참정권 획득운동은 초기에는 서명과 청원,실내모임 등 비교적 온화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지만 갈수록 과격한 형태로 변해갔다.결과적으로는 그같은 과격한 운동방식이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게 된다.
미국과 유럽 여성들은 노예반대 운동을 펼치면서 자신들의 지위가 노예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실제 19세기 초부터 실시된 노예반대 운동에는 여성들이 활발히 참여했다.그러나 많은 노예제도 반대단체는 여성의 가입을 금지했다.
1840년 런던에서는 세계노예제도반대총회가 열렸다.당시 미국에서 왔던 루크레티아 모트와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토론에 참여할 수 조차 없었다.이 두 여성은 8년 뒤 미국 뉴욕주의 세네카폴스에서 여성권리 문제를 토론하기 위한 대중집회를 갖고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본 뜬 "원칙과 취지의 선언"을 발표했다.이 대회를 계기로 여성참정권의 획득을 목표로 하는 많은 단체들이 생겨났다.
여성운동가 앨리스 폴의 등장도 큰 전기가 됐다.그녀는 과격하게 참정권운동을 펼쳤다.폴은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종전이 될 때까지 백악관 앞에서 피켓과 현수막을 내걸고 시민불복종 운동을 벌였다.폴은 당시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1차 대전에 참전했던 윌슨 대통령에게 "미국의 모든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해 미국의 민주주의부터 증진시키라"고 주장했다.
이같은 운동의 결과로 미국에서는 1920년 여성의 참정권이 연방헌법에 명시된다.
영국에서는 좀 더 처절한 과정들을 거쳤다.
영국 여성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영국 여성들의 참정권운동에 기념비적인 인물.두 딸과 함께 창문파괴 등의 전투적 참정권 운동을 펼쳤다.
1913년 영국 엡섬다운스 경마장에서는 에밀리 데이비슨이라는 여성이 참정권을 요구하며 국왕의 말에 뛰어들어 죽는 사고가 발생,여성들의 참정권획득 운동에 불을 지폈다.여성들은 감옥에서 단식을 해가며 참정권을 요구했고 결국 1928년 쟁취했다.
대혁명 당시부터 여성의 목소리가 높았던 프랑스에서는 여성의 참정권이 아주 늦은 1945년에야 인정됐다.김용자(덕성여대 사학과)교수는 늦은 이유를 "여성 표가 보수쪽으로 기울어질 것을 두려워한 좌파와 여성이 정치의 장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우파가 결합,참정권 획득을 방해했기 때문"이라고 짚는다.
여성의 참정권 획득 시기는 뉴질랜드 1893년,소련 1917년으로 비교적 이른 편이지만 일본 1946년,그리스 1951,스위스 1971년으로 그 역사가 오래지 않다.우리나라는 1948년. 김진경기자 j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