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 2020-07-25 14:23:53
※편집자주-1987년 봄, 부산 사상구 주례동 백양산 자락. 육중한 담장 너머로 '형제복지원'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12년 동안 공식 사망자만 513명. 이후 33년이 지나서야, 최근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작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부산일보>는 '살아남은 형제들-형제복지원 절규의 증언' 영상구술사 프로젝트를 통해 피해자들 기억 속 진실의 조각을 맞춰보려 한다. 33인의 목소리가 모여 33년 전 '한국판 아우슈비츠'의 실체를 밝히는 한 걸음, 수만 명 피해자의 아픔을 치유하는 다음 걸음으로 이어지길...('살아남은 형제들' 시리즈는 매주 토요일 연재됩니다.)
<간추린 이야기>
1988년 2월 4일.
박순이(하안녕·49) 씨는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진주의료원에서 아이를 낳았다. 아이 아빠는 '김광석'. 자신을 성폭행한 형제복지원 중대장이다.
1980년 초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기 전 겨울방학, 열 살 소녀는 부산에 사는 큰오빠 집에 가기 위해 부산진역에 내렸다.
오빠를 기다리는데 순경 2명이 다가왔다. 오빠가 오면 다시 데려다 줄 테니 (경찰)지서로 가자는 말에 순순히 따라나섰다. 깜박 잠이 들었다 깼고, 오빠에게 데려다 준다기에 '탑차'에 올랐다. 차는 오빠집이 아닌 형제복지원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다그치듯 이름을 물었다. 무서운 마음에 순간 사무실 문 앞 글귀('안녕하세요')를 보고 '하안녕'이라 말했다. 그때는 몰랐다. '하안녕'으로 7년을 살 게 될 줄은...
키가 커서 아동소대 대신 여자 성인소대(25소대)로 배치됐다. 1층엔 장애인 몇 명도 함께 생활했다. 매일 삼시세끼, 한 장애인을 식당까지 업고 나르며 3년 동안 돌봤다.
그러던 어느 날, 바지에 오줌을 싼 그 장애인을 한겨울에 마포(밀대) 걸레로 씻기는 장면을 목격했다. 말리고 싶었지만 '내가 살려면' 그럴 수 없었다.
지옥 속에서도 '청춘'은 피어올랐다. 수요일과 일요일, 교회당에 가는 날이면 청춘남녀가 조심스레 눈을 마주쳤다. 몰래 쪽지를 전하기도 했다. 한때 혈서가 유행해 '사랑의 메시지'를 건넸다. 다음날 발각돼 박인근 원장에게 딸딸이(슬리퍼) 뺨을 맞았다. 빠따로 허벅지 82대를 맞고 정신병동(A동)으로 근신 조치됐다.
그때는 '그게' 뭔지 몰랐다.
경비들이 정신병동 복도 끝방으로 환자를 끌고 간 뒤 '이상한 짓'을 했고, 벨트 버클을 잠근 뒤 경비를 서러 떠나곤 했다.
얼마 뒤 헛구역질과 오바이트를 하면, 밖에서 여자 의사가 왔다. 지하실에서 '이상한 기구'를 써가며 주사를 놓았다. 사회에 나와서야 그게 산부인과에서 쓰는 '오리주둥이'란 걸 알았다.
정말 멍청했다. 그땐 '그게' 뭔지 몰랐다. 여성소대라고 다르지 않았다.
밤에 언니들이 불려나가면 돌아올 시간에 맞춰 앞에 서서 기다렸다. 초코파이, 밀감, 산도… 언니들이 갖고오는 간식을 얻어 먹기 위해서였다.
탈출을 마음 먹었다. 그러기 위해선 철장 검사 역할을 맡는 '서무'가 돼야 했다. 기존 서무를 겁박해 자리에서 내려오게 했다. 탈출을 모의한 일당 6명 중 박 씨가 유일하게 도망 전력이 없어 서무가 됐다.
탈출 보름 전 김광석(중대장)이 밤에 불렀다. 아무 것도 모른 채 겁탈을 당했다. 무조건 탈출해야 했다.
쇠톱으로 철장을 끊고, 껌을 붙인 뒤 물감을 칠했다. 계획보다 일찍 철장이 다 끊어지는 바람에 곧장 탈출을 감행했다. 1987년 5월의 어느 날이다.
유리가 박힌 담을 넘고 온몸에 피가 흐르는 몰골로 인근 군부대에 발각됐다. '진짜 군인' 소대장실로 불려갔다. '세상 물정'을 아는 한 언니가 박 씨를 비롯한 나머지 5명에게 잠깐 나가 있으라고 했다.
그 언니의 '희생'으로, 소대장이 퇴근할 때 군차량에 몸을 숨긴 채 대연동 기찻길까지 나올 수 있었다.
한 치과 의사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았다. 어쩌다보니 중앙동 40계단에 다다랐다. 근처에서 홀서빙 일을 하다 사흘째 되던 날. 고기를 사오라며 받은 돈 3~4만 원을 들고 그대로 사상터미널로 줄행랑을 쳤다. 진주 가는 버스를 잡아타고 낙동강을 지날 때까지 계속 뒤를 돌아봤다.
집에 도착하니 아버지가 청마루에서 도토리묵을 드시고 있었다. 박 씨를 보는 순간 실신을 했다. 7년 만에 돌아온 막내딸이었다. 딸을 찾으러 돌아다니며 담배를 많이 핀 아버지는 폐암에 걸려 있었고, 2년 뒤 돌아가셨다.
엄마는 "너 때문에 아버지가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며 집을 나가라고 했다. 친엄마는 아니지만 남편이 밖에서 낳아온 딸을 품어준 엄마였다.
스무 살 성인이 되자마자 집을 나왔다. 서른에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과거 비밀'을 털어놨지만 "괜찮다"며 결혼을 약속했다.
가정을 꾸렸지만 트라우마는 사라지지 않았다. 두 아이를 낳았지만, '딸'이라는 이유로 남편에게조차 맡기지 않았다. 2016년 박인근 원장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탈출을 위해서였지만 한때나마 '서무'란 간부를 맡았던 죄책감에 피해자 모임 총무로 활동했던 박 씨. 지금도 피해자들과 두루두루 연락하며 도움을 주는 '누나·동생' 역할을 하고 있다.
박 씨 소원은 하루빨리 진상조사가 이뤄지는 것이다. 피해자들이 이 사회 구성원으로 당당히 서는 그날. 33년째 불면증에 시달리며 그날을 고대하고 있다.
<더 많은 이야기>
■ '박순이'에서 '하안녕'으로
제가 3학년 올라갈 당시에 방학 기간이 있잖아요. 엄마가 "오빠 집에 가서 며칠 놀고 오이라" 해서. 남문산역에서 1080원 기차비를 주고 기차를 탔죠. (부산)진역까지요.
근데 순경 2명이 와서 "왜 꼬마야 여기 앉아 있냐?"고 해서 "오빠를 기다린다" 했더니 자기들이 오빠가 오면 여기 데려다줄 테니까 (경찰)지서로 가자는 거예요.
제가 집 근처에 지서가 있어서 하도 지서를 많이 놀러 다녀갖고 별로 그런 게 없었어요. 가자니까 갔어요.
깜빡 잠들었다 눈 떴는데 옆에 사람들이 한 스물 몇 명이 되는 거예요. 이 차 타면 오빠한테 데려다 준다는 거예요.
고바위 길을 좀 올라가서 딱 멈췄는데. 문 롤러 열리는 '끼이익' 소리 있죠? 엄청난 대문이 열리는 것 같아요.
"벽에 붙어라" 하고 "이름이 뭐냐"고 막 하길래... 들어가는 문에 '안녕하세요' 이렇게 써 있었어요. 순간적으로 그냥 "하안녕인데요" 이렇게 된 거예요.
7년을 거기서 '하안녕'으로 산 거죠. <새마음>지 수기에... 안에 내 고향하고 내 본 이름하고 다 들어 있죠.
꼬라박으라는데 꼬라박을 줄 알아야 꼬라박죠. 피를 토할 것 같더라고요. 이게 역류가 되니까요. 아침 되니까 얼굴이 이만큼 부어요.
적응을 떠나서요.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제일 많이 들었어요. 여기서 살아 나가야겠다.
남녀는 눈만 마주쳐요... 교회 갈 때 일요일날 수요일날. '백사'라는 오빠가 쪽지를 많이 전해 줬어요. 우리 여자 소대에 '혈서 편지'가 한창 돌았네요. '사랑을 맹세한다'고.
그걸 미친놈이 수요일날 교회당에 갖고 갔네요. (하얀)와이셔츠니까... 피니까 그게 비쳤을 거 아니에요.
다음날 갑자기 방송이 나와요. "25소대 서무 하안녕이는 즉각 사무실로 뛴다!"
딱 들어가는데 갑자기 막 (박인근) 원장이 나오더니, 딸딸이(슬리퍼) 뺨을 한 스무 대는 맞았는가. 정신이 한 개도 없어요. 빠따 82대 맞고... 허벅지가 다 터져갖고...
정신병원에 근신을 당했어요. 정신병자들을 케어를 하는데... 자다가 이년이 머리채 끌고 가고 저년이 끌고 가고... 난 정신병자들이 그렇게 힘센 줄 몰랐어요.
형제복지원에서 충격이 제일 컸던 거는... 정신병자들이 너무 환자들이 밖으로 뛰니까... 운동장으로 데리고 나오니까... 구름다리를 만들었어요.
근데 그 사람이 공포증이 좀 있었던지 뛰어내렸는데 골이 빠개져버렸어요. 간부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 골을)쓸어 담더라고요.
■ '껌'과 '물감'으로, 필사의 탈출
교회를 가려면 그 '선도실'을 지나가야 돼요. 고문할 거 다 들어 있죠 거기에. 빠따도 소금물에 담긴 거예요. 한 대 맞으면 어떻겠어요. 죽어요.
한 대 맞으면요 그냥 자동으로 무릎이 꿇어져요. 그 뒤에는 맞을 만해요. 허벅지에 감각이 없응께.
중대장이 빠따를 기깔나게 쳐요 그냥. 여자들은 아기 못 낳는다고 힙(엉덩이) 안 때려요. 허벅지 때리고... 남자들은 엉덩이 때리고...
잘못 때리서 머리 터지면... 지금으로 볼 때요... 그때는 몰랐으니까. 쓸 것이 있는 사람은 아침까지 새벽까지 시체를 놔두면, 이름은 아무 것도 안 써 있고 그 차가 들어와서. 이빠이 피복창고 쪽으로 뒤로 후진해서 대갖고 싣고 가고. 해부용으로 필요가 없다 그러면 새벽에 저기 교회 뒤로 경비들이 (시신을 들고) 올라간다 하더라고요.
(한 원생이) 소대에서 철사에 끊겼는데 배가 쩍 벌어졌어요. 진짜 창자가 다 나와 있어요. 근데 박인근이가 뭐라는 줄 아세요?
"야! 중대장 불러!" "소금통 들고 오라 해!" 배에다 소금을 뿌려버려요.
그것만 그런 줄 아세요? 밥 먹다 좀 떠들면 젓가락 탁 던지면 귀신같이...(꽂혀요)
밥판이 촤악 있어요 쇠밥판... 군대처럼. 말 안 들으면 서 있는데 확 (밥판을) 빼버려요. 살이 확 갈라져버려요. 지금 그 흉터가 이만큼밖에 없는 거예요. 원래 이만큼 있었는데.
87년 5월 10일에서 15일 사이에 도망을 나왔거든요. 6명이 작당을 한 거예요.
원래는 '불독'이라는 애가 서무를 하고 있었어요. 그 아이가 있는 한 우리는 도망을 못 가요. 왜 그러냐면, 형제복지원은 일석점호를 치고 나면 철장 검사를 해요. 철장이 조금만 터져도 '또로록' 할 때 '퍽' 소리가 나요.
나만 유일하게 한 번도 도망 안 가고 제일 착하게 산 어린이라 '서무'가 된 거예요. 오직 도망을 가기 위해서...
이제 그때부터 철장을 뚫어야 될 거 아니에요. 하나를 뚫고 껌을 씹어서 거기다 붙여서... 페인트칠... 거기(껌)다 물감을 칠해 놓은 거예요.
근데 계획한 날짜를 며칠 앞두고 "안녕아, 큰일 났다!" "왜?" 다 뚫렸다는 거예요.
인제 급한 거죠. 와 저는 그때 처음 알았어요. (어깨) 이게 나가니까 몸이 다 나가데요.
와 벽 조금 위에 그런 게 있는 줄 몰랐어요. 딱 타서 딱 밟았는데요. 유리가 촤악 다 막... 어떻게 표현을 못 해요... 살이... 머리채를 잡아갖고 6명을 끌어올린 거예요.
그쪽에 부대가 두 개가 있더라고요. 진짜 군부대였어요. 쌍라이트를 켜고 총을 겨누더라고요. 손을 들래요. 들어서 다 들어오래요.
진짜 소대장이 근무하는 실에 들어갔는데... 그 언니가 그때 당시에 우리 보고 다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몸을 헌신하고... 소대장 퇴근 시간에 군인들 태우는 차 거기 밑에다 모포를 깔아서 다... 누워서 나왔었죠.
대연동 기찻길이 있었어요. 거기서 다 내렸어요.
■ 밤에 중대장이 불러서 갔는데…
정신병원에서는 제가 8개월 정도 (돌보미로) 있었어요. 제일 끝에가 경비들이 자는 데였죠. 그때 당시에 그걸 몰랐어요 그게. 열 살 때 갔으니 뭔 '성'을 알겠어요.
(환자) 하나 끌고 갔다가 두세 놈이 건드려 놓고 벨트 버클 막 잠그고. 그러고 나서 완장 차고 경비 서러 가고 이러니까.
오바이트를 하고 막 이러면 산부인과에서 오더라고요. 지하가 있어요. 배 딱 까보드만... 여자가 와요. 그럼 '오리주둥이'... 주사로서 그 아이 태아를 죽이는... 그런 거 같았어요. 대변 안 나오면 하는 주사기 큰 거 있죠.
지금 생각하니까 내가 너무 미안한 거죠. 그 사람들한테. 그때 알았더라면... 알아도 힘은 없었겠지만. 하지 말라고 보호는 해주지 않았을까. 그런 때 제일 가슴 아프고.
근데 이거는... 제가 처음 하는 소리인데... 그래서 제가 6년만 거기서 있었다고 한 거예요. 본래 7년 있었어요... 근데...
도망 나오기 한 보름 전에 김광석(중대장)이가 선도실로 불렀어요. 밤에. 딴 언니들이 밤에 불려가면 밀감이나 사탕 같은 걸 얻어 와요. 그거 얻어먹으려고 우리는 그 앞에 서 있었어요.
그게 성폭행인 줄 모르고 멍청한 것들이.
빵도 가져오고 초코파이도 가져오고 산도도 가져오고 그러니까. 멍청한 것들이 그 언니가 나가고 언제쯤 온단 시간에 거기 서 있는 거예요. 그거 얻어 처먹으려고.
난 지금 그게 너무너무... 그 언니들한테 너무너무 미안한 거예요.
도망 나오기 보름 전에 김광석이가 불러서 갔는데...
겁탈을 당했어요.
도망을 나와서 한 달이 지났나... 밥맛도 없고...
임신이 된 거예요.
그래 가지고 엄마한테(얘기하고)... 아버지한텐 말도 못하고. 직장을 다닌 거예요. 밀감 공장을 (아기) 낳는 날까지. 너무 예비(여위)니까 표가 안 났던 거예요.
그래서 제가 18살 때 2월 4일날 진주의료원에서 애기를 낳았어요. 그러니까 엄마가 (아기를) 입양을 보낸 거죠.
그렇게 하고 8월달에 내가 김광석이 김해에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전화부에서 김광석이 전화번호를 싹 찾았어요.
형제복지원에 있던 '김해 김 씨에 빛 광 자에 돌 석 자'라는 사람 맞냐고 제가 물어봤어요. 맞다고 했어요.
한번 만나고 싶다니까 자기가 김해에서 중고 가구점을 한대요. 가면 죽일 것 같았어요... 진짜로...
그래서... 안 가고...
이 얘기는 제가 왜 부산일보에 털어놓게 됐냐면. 피해자들이 볼 거 아녜요. 부산 지역에 여자(피해자)들이 많이 살고 있으니까. 조금이라도 용기를 내서 나오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 '트라우마' 속에 키운 두 딸
도망 나와갖고 차비가 없으니까 집을 못 가죠. 딱 지나가는데 치과 위에 옥상에요. 신발 몇 켤레에 간호사복들이 걸려 있는 거예요.
(옥상으로) 올라가는데... 치과의사가 문을 팍 열고 나오네요. 피 다 닦아주시고. 이런 데 (유리)파편 박힌 거 현미경으로 보셔가지고 다 빼주시고.
옷을 얻어 입고 우째 갔는데 (중앙동) 40계단으로 갔어요. 홀서빙을 구하네요. 3일 하다가요. 고기를 사오라는 거예요.
그때 당시에 3만 원인가 4만 원 줬을 거야. 그거 들고 도망 왔어요.
사상터미널 가는데요. 모가지 디스크 걸리는 줄 알았어요. 잡으러 오는 줄 알고.
(버스가) 낙동강 지나갈 때까지 또 디스크 걸릴 뻔했어요. 잡으러 오는가 싶어서(계속 뒤돌아 보느라). 중간쯤 가는데 그때 마음이 놓이더라고요.
(고향 진주에) 갔는데 우리 아버지가 도토리묵 먹다가 청마루에서 기절해버렸어요. 딸내미가 없어진 지가 근 7년이니까.
3년을 찾아다니다가 포기를 했어요 저희 아버지가. 저 찾는다고 담배를 너무 피셔가지고 폐암이 걸려 있더라고요. 2년 있다가 돌아가셨거든요.
2014년 이전까지 (제 과거를) 안 사람은 우리 아저씨뿐이에요. 아기 얘기도 하고... 제가 결혼을 못 한다고 했어요.
"다 감수할 수 있다" "착실히 살면 아이들도 다 인정해준다" 지금 결혼한 지 21년 정도 됐어요.
'그것이 알고싶다'를 찍으면서 아이들한테 얘기를 했죠. 지금 제가 삼례에서 산 지 16년 됐거든요. 사람들이 다 놀랐죠. 애들이 충격이 많이 컸었죠.
왜 그러냐면 애들을 너무 스파르타식으로 키웠어요. 어린이집을 4년을 태워다주고 태워오고. 초등학교 6년을 태워다주고 정문 앞에 딱 기다렸다 또 태워오고.
중학교 2년을 태워다주고 태워오고. 1학년을 태워다... 연년생이에요.
그러고 2016년도 박인근이가 죽었다 하더라고요. 조금 마음이 놓이더라고요.
아이들을 누구한테도 한 번도 맡겨본 적이 없어요. 저희 신랑마저도 아이들을 돌 지날 때까지 한 번도 안아본 적이 없어요.
손을 못 대게 했으니까 내가요. 자기 자녀지만 여자애들이잖아요. 거기에 대한 트라우마가 엄청 심했어요.
어렸을 때는 제가 술을 많이 먹었어요. 즐기기 위해서 먹는 게 아니라 잠을 자기 위해서.
한 일주일 동안 안 자요. 날을 새요. 그러다가 하루는 3시간 자요. 그게 33년을 반복해온 거예요.
그리고 지금 저희 안방에 문이 없잖아요. 문을 닫으면 잠을 못 자요. 문을 닫으면 누군가 지키고 있는 거 같고. 커튼도 지금은 이렇게 쳐놨는데 잘 때는 다 걷어야 돼요.
텔레비전을 끄면 잠을 못 자요. 누군가 옆에서 얘기를 해야 돼요.
사회생활 하면서 그 형제복지원과 같이 약간 일치하는 부분이 오면. 분노가 일어나죠. 혈압이 오르고... 어떻게 주체 못할...
그러면 집에 와야 돼요. 운전 막 해가지고 와서 냉장고에 소주 한 잔 털어먹고 가만 앉아 있어요.
애들 어렸을 때는 막 칼도 많이 들고 그랬어요. 죽는다고 하고...
3년 전에도 죽으려고 약 다 털어먹고. 작년 5월달에도 털어먹고... 전북대(병원) 실려가고.
지금도 그냥 복지사가 문자가 오네. 잘 계시냐고. 안 죽고 살아 있다고...
■ "순이는 착하지" 그때 말할 걸…
지금도 제일 가슴 아팠던 게... 시장 가면 군용양말하고 군용장갑 있잖아요. 그걸 1학년 때 처음으로 (아버지) 생일 선물을 해줘보고,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생일을... 처음으로 양말 한 켤레를 사줘봤어요.
19살까지만 해도 (아버지) 생일을 다 챙겨드릴 수 있었는데. 이놈의 형제복지원 때문에 모든 것이 그냥...
아버지는 엄청 우셨어요. 근데 엄마는 "니가 그런 데 가서 아버지가 병을 얻어서 죽었다" "너 때문에 죽었다 나가라 나가라"
그리고 엄마가... 내 친엄마가 아니에요. 엄마가 (제가) 스물일곱 살 때 돌아가셨어요. 그래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아버지가 바람 핀 자식을 데리고 나와서 키워줬으니까...
우리 엄마가 부산을 함 가자 해서 갔는데. 오빠가 술을 한 잔 먹으면서 무릎을 꿇고 빌더라고요.
"오빠!" 내가 그때 그랬어요 "왜 안 데리러 왔냐"고. 단골손님이 배터리를 갈아 달라고 해서 금방 갈고... 자기 딴에는 금방 갈고 왔는데 없더래요.
아버지가 엄청 원망했대요. '너 때문에 순이가 어디 갔는지 소식이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저한테 한 말이 있거든요. "우리 순이는 항상 착하지" 그 말에... 지금도 술을 먹으면 눈물이 나요.
그때 아버지가 "착하지" 할 때 그 얘길 했어야 되는데... 아 그때 그냥 애 낳았다고 얘기를... 아버지한테 착한 딸 아니라고 얘기했어야 되는데... 그걸 못 한 게 지금도 너무너무 가슴 아파요.
근데 우리 딸들은 인정해줘요. 우리 엄마 정말 자기들 낳고 고생도 많이 하고... 거짓말 아니고 제가요. 결혼해서 쫄딱 망하고 길거리 파지까지 주워봤어요.
형제복지원에 억울한 것도 있는데... 고마운 건 딱 한 개 있어요.
'인내심'이에요.
내가 그 속에서도 살아남았는데. 개뿔 내 지금 자유로운데 이걸 못하겠어?
■ 세상 앞에 우뚝 설 수 있게…
'그것이 알고싶다' 처음 봤을 때, 아 이제 수면 위에 떠오르는 구나.
도망을 가기 위해 서무를 했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때렸을 수도 있다. 그 (서무 생활) 8개월의 죄를 내가 조금 씻어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피해자모임) 활동을 하게 된 거예요.
이○○(소대장)이도 죽은 거 봤는데요. 후두암을 앓고 있었으니까. 죽기 전에 한 번만 피해자 모임에 나와서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다 그랬더니.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틀 있다 전화 와서 못 하겠다 하더라고요.
얼마 뒤에 '055' 라는 전화번호가 떠요. 그분(이○○)이 돌아가셨는데 시체 확인을 해줘야 된다. 핸드폰 연락처를 싹 다 지우고 제 번호만 남겨놓은 거예요.
영안실에 가서 (흰 천을) 딱 들췄는데... 눈물이 나야 되는데 눈물은 정말로 한 개도 안 나고. '오빠 니 업보다'. 피해자이면서도 우리를 그만큼 괴롭혔으니까.
(사진을 가지러 이○○ 집에 가서) 방문을 딱 여는 순간 너무 놀랐어요.
물건이 나처럼 이렇게 정렬하게 돼 있는 거예요. 저희들의 트라우마예요. 토요일 되면 내무반 사열을 치다 보니까 물건이 반듯이 있어요.
이불을 개비놨는데 형제복지원(있을 때처럼) 각을 맞췄어요. 그걸 보고 섬찟하더라고요.
피해자들이 좀 더 빨리 진상조사나 이게 정리가 돼서... 내일 죽더라도 오늘의 그거를...
좀 하루라도 편히 사는 방법이... 그게 내 소원이고.
우리가 피해자로서 인정을 지금 받은 것도 아니고, 형제복지원 피해자라 해서 특혜를 보려고 하지 마라. 딴 일반 시민들도 엄청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너무... (기초생활)수급에 많이 찌들어 있어요. 앞전에 고통으로 인해서 그런 트라우마들이 있으니까. 사람들하고 접촉을 못 하고...
빨리 이게 진상조사가 돼서 쫌... 남들 앞에 우뚝 설 수 있는... 한 번이라도 설 수 있게 만들어줬으면 하는 게... 소원이고...
이대진 기자 djrhee@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