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를 다하고 버려진 것들’에서 탄생한 일련의 작업

이창진 개인전, 31일까지 어컴퍼니
수집된 동양화 콜라주·설치작 전시
올해는 버려진 여백까지도 활용 중

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 2025-05-27 09:00:00

다이어그램 작품 앞에 선 이창진 작가. 김은영 기자 다이어그램 작품 앞에 선 이창진 작가. 김은영 기자

“기자님도 ‘당근’ 하세요? 소위 동양화라고 하는 게 당근 마켓에 너무 헐값으로 나오는 게 위화감이 느껴지더라고요.”

“때때로 당근마켓에 접속한다”는 이창진 작가의 말을 들으면서 처음에 좀 별난 사람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같은 작가 입장에서도 위화감이 들 만하다 싶었다. 지난 20일부터 부산 해운대구 어컴퍼니에서 개인전 ‘빈 종이’를 열고 있는 이창진 작가를 만났다.

“고속도로 화장실에 걸려 있을 법한 해바라기밭의 풍경화부터 90년대 미대생이 그린 그림, 누구나 알 법한 작가의 그림도 있었어요. 그중에서도 이상하게 관심이 갔던 게 동양화였어요. 사군자와 산수, 목단을 비롯한 화려한 꽃과 동식물들의 그림들, 글귀를 한구석에 써 놓고 빨간 도장을 찍어 놓은 비슷비슷한 형식들…어릴 적 제게 동양화는 주변에 늘 있어서 누가 그린 그림이라는 생각보단, 전화기나 소파처럼 그냥 그곳에 있는 가구 같은 물건처럼 여겨졌죠.”

2022년 12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약 8개월 동안 모은 200여 점의 그림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누군가의 그림을 내 손으로 오려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없지 않았지만, 사적인 감정은 접어두기로 했다. 액자와 나무틀을 떼어내고, 빳빳하게 만들기 위해 다시 삼합 한지에 배접했다. 중첩된 산과 들, 나무, 집 따위를 따로 오려내고, 시점과 색감, 크기, 형태에 따라 벽면에 커다란 풍경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조합은 반복됐다. 당근 마켓에 걸어놓은 #병풍 #옛날그림 #동양화 #민화 #산수화 #한국화 같은 20여 개의 키워드에선 연일 “당근~ 당근~”하고 알림음이 울렸다.

이창진 작가 작품 전시 전경. 어컴퍼니 제공 이창진 작가 작품 전시 전경. 어컴퍼니 제공
이창진 작가 작품 전시 전경. 어컴퍼니 제공 이창진 작가 작품 전시 전경. 어컴퍼니 제공

이창진의 작업은 이처럼 ‘쓸모를 다하고 버려진 것들’에서 시작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새 생명을 얻고 탄생한 일련의 작업에 대해 작가는 ‘통계학적 미술사’로 명명했다. 수집된 이미지를 화조도나 산수화 등 동양화의 형태로 재구성했다. 업사이클링이 따로 없다. ‘지속 가능한’ 미술이다. 2024 더프리뷰 성수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던 것도 바로 이 시리즈였다.

이번 전시 ‘빈 종이’는 ‘통계학적 미술사’ 시리즈도 있지만, 오리고 남은 동양화의 ‘여백’에 주목한 ‘오각형’ 연작이 새롭게 소개된다. 그림 수집은 재작년 전시 때까지 모은 300점에서 일단 멈췄다. 여백이 너무 신경 쓰여서였다.

이창진 작가 작품 전시 전경. 어컴퍼니 제공 이창진 작가 작품 전시 전경. 어컴퍼니 제공

“오각형 연작은 다이어그램, 산수도 등의 작업을 위해 원화 속에서 필요한 형상을 오려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여백을 소재로 삼은 시리즈입니다. 단순히 빈 곳이 아니라, 이미 형상을 내포하고 있는 주체적인 존재로 의미가 있음을 보여주는 거죠. ”

이번에 선보인 16작품 모두는 올해 들어서 만든 것이다. 또한 빈 종이에서 형상이 잘려 나간 모양 중 자투리 중 일부는 ‘표본’이라는 추상화 작업으로 완성됐다. 수집된 이미지가 전부 작업에 소진되고, 원작에서 발생한 그 어떤 잔여물도 남기지 않으려는 작가의 태도가 담겨 있다. ‘복제’ 시리즈는 이번 개인전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작품이다. 원화 ‘백학도’ 속에서 오려낸 새의 형상으로 작업의 과정을 시각화했다.

이창진 작가 작품 전시 전경. 어컴퍼니 제공 이창진 작가 작품 전시 전경. 어컴퍼니 제공
이창진 작가 작품 전시 전경. 어컴퍼니 제공 이창진 작가 작품 전시 전경. 어컴퍼니 제공

“다각형 중 오각형은 사각형에서 벗어나는 그 시작점이라서 좋았습니다. 다시 오각형에서 변을 하나씩 늘려가면 점점 원이 되고 또 중력에서도 벗어나게 되겠죠. 원래 그림에서 하늘의 역할이던 빈 종이 여백은 그렇게 또다시 오각형의 패널 속에서 마치 누워서 하늘을 보듯 또다시 천창을 열어 줄지도 모르잖아요.”

1979년생 이창진 작가는 부산대와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쳤으며, 현재 금정구 금사동 예술지구P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전시는 오는 31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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