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 | 2025-10-28 09:00:00
방정아, 소름쫙, Arcylic coloring on cotton lumps, 2025. 맥화랑 제공
방정아 개인전 ‘물불 안 가리는 사람’ 맥화랑 오프닝에 참석한 작가 모습. 방정아 제공
지난여름 방정아(57) 작가는 두 개의 개인전을 동시에 준비하느라 몸과 마음이 몹시 바빴다. 오는 11월 1일까지 열리는 부산 해운대구 달맞이언덕의 맥화랑 개인전 ‘물불 안 가리는 사람’과 2024 오지호미술상 수상 기념 광주시립미술관 전시도 11월 20일(개막식은 11월 27일) 시작하기 때문이다.
방 작가가 부산에서 여는 개인전은 ‘욕망의 거친 물결’(신세계센텀시티, 부산) 전시 이후 2년 만이지만, 지난 5월 ‘아트부산 2025’ 전시장에서 그 어떤 작품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 대형 걸개형 천 작품 ‘얼씨구 절씨구’와 ‘올리버 스톤의 수영’으로 눈길을 끌었다. 또한 지난달 3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개최한 ‘2025 키아프 서울’에서도 맥화랑을 통해 선보인 방 작가의 2025년 신작인 대형 솜 작업 ‘손톱달님’과 ‘소름 쫙’으로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방정아, 손톱달님(왼쪽), 소름쫙, 2025. 김은영 기자 key66@
방 작가의 이번 맥화랑 개인전도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상업 화랑 전시는 2016년 공간화랑 ‘이야기’전 이후 9년 만이어서다. 2024년 베를린 전시(빛나는 핵의 바다) 외에 미술관이거나 복합문화공간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실제 이번 전시를 개막한 지난달 20일 이후 화랑을 찾은 관람객 중에는 “상업 화랑에선 자주 못 보던 전시여서 신선하다” “대형 설치 작업만 하는 줄 알았는데 평면 회화 작품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드세고, 무서운 작가인 줄 알았는데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소재나 주제의 작품이 많아서 가깝게 느껴졌다” 등의 반응이 잇따랐다.
방 작가도 사람들의 이런 반응이 조금은 놀라웠던 것 같다. “내가 너무 거창한 이야기, 거대 담론만 이야기해서 사람들한테 무겁게 다가갔나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사실 이런저런 말을 신경 쓸 필요는 없지만, 방 작가의 활동 스펙트럼이 확실히 넓어진 듯했다. ‘아트페어’ 참여 작가로 나선 것도 포함해서다. 올해 두 번의 아트페어 참여는 맥화랑과 함께했다.
맥화랑 장영호 대표는 “우리도 상업 갤러리로서 판매를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되는데, 판매만 생각했으면 방 작가한테 프러포즈하기가 힘들었을 겁니다. 방정아라는 작가의 작품을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방 작가 작품은 우리 일상에서 소재를 찾기 때문에 누구든지 공감할 수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데 컬렉터들도 잘 모르는 것 같거든요”라고 말했다.
방정아, 지릿지릿, 2025. 맥화랑 제공
방정아, 일렁이던 너희, 2025. 맥화랑 제공
방정아, 얼룩말 몸 사람, 2025. 맥화랑 제공
홍익대 미술대학 회화과를 1991년 졸업한 방 작가의 그림은 ‘아메리카’(미광화랑, 부산), ‘방정아 개인전’(동원화랑, 대구), ‘이상하게 흐른다’(로얄갤러리, 서울) 등을 개최한 2010년을 기점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미국 여행이 결정적이었다. 점령당한 미국 원주민과 승자의 역사에 밀려난 주인공에 대한 불편함이 커졌다. 그러다 한국의 정치 상황이 오버랩되면서 그전에 그렸던 그림이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나온 작품이 ‘관세음보살 시리즈’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현대 사회의 고통과 삶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당시만 해도 이 그림은 평가받지 못했지만, 2019년 부산시립미술관 전관에서 열린 ‘믿을 수 없이 무겁고 엄청나게 미세한’ 전시 때 다시 소환된다.
말이 난 김에, 국내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올해의 작가상 2021’(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선정이 끼친 영향이 궁금해 질문했다. 그러자 함께 자리한 다른 사람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캔버스에서 벗어나서 대형 작업을 하게 되었어요.”(제이작업실 제이스 실장), “뭔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셈이니까 작업에서도 안정감이 생기고, 좀 더 포용적이 되었던 것 같아요.”(김정원 맥화랑 큐레이터), “책임감 같은 게 분명히 있었을 것 같아요. 작업으로는 범위가 넓어지고 깊어졌다고 할까요? 사각의 프레임 바깥으로 벗어나는 건 느낄 수 있었어요.”(장영호 대표).
이번에는 당사자인 방 작가가 입을 뗐다. “갑자기 변했다기보다는 그 앞에 군불을 때는 어떤 시도들이 있었죠. 2015년인가 2016년 핵발전소를 답사하는 팀이 만들어지면서 사회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두게 돼 공부를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 나라도 발언을 해야겠다는 의무감도 생겼는데 올해의 작가상까지 이어진 거예요. 그 전시도 상당히 힘들었어요. 어마어마한 전시 공간을 과연 내가 메울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도 들었고요. 그 과정을 극복하고 나니까 ‘이 작가는 큰 작업도 소화해 내는군!’ 하면서 큰 전시로 이어졌어요. 진짜 좋은 경험을 했어요.” 제이스의 말처럼 올해의 작가상 선정이 작업의 대형화에 큰 역할을 한 것이다. “누가 나를 찔러주길 기다렸던 것 같다”고도 했다. 그 뒤 많은 전시가 이어졌다.
이번 개인전 제목은 어떻게 나오게 된 것일까. ‘물도 좋고, 불도 좋다. 이것도 좋다, 저것도 좋다’는 의미인가? “제이스 실장이 작가님은 물불을 가리지 않잖아요!”라고 한 말에서 나왔다고 방 작가는 귀띔했다. 그러면서 “‘물과 불’처럼 반대 성질이지만 서로 품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방정아, 너를 이렇게라도 안아 본다, 2025. 맥화랑 제공
방정아, 그의 마지막 정원, 2025. 맥화랑 제공
그래서 작가의 화면에는 서로 무관해 보이지만 묘하게 맞닿은 이미지들이 자리한다. 예를 들면 버스 창밖의 표범과 호피무늬 가방을 끌어안은 여자가 등장한다. 작품 제목은 ‘너를 이렇게라도 안아 본다’고 적었다.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듯한 인간의 일면을 엿본 듯해서 웃음이 나왔다. 이럴 때 작가의 화면에 들어가 있는 작품 제목은 묘한 쾌감을 준다. 김정원 큐레이터는 “작가는 물과 불처럼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사물과 상황을 함께 붙잡고, 그것을 살아내는 인간의 태도에 주목한다”고 지적했다. 일상 속에 겹겹이 얽힌 모순, 즉 삶과 죽음, 권력과 약자, 자연과 인간을 비추는 은유인 것이다.
방정아, 나 지금 넘어간다, 한복 천 위에 채색, 2025. 맥화랑 제공
방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캔버스 회화 작업과 더불어 실험적 작업도 선보였다. 키아프 서울에서 첫선을 보인 목화솜 이불 속통을 펼쳐 제작한 대형 솜 작업(‘손톱달님’과 ‘소름 쫙’), 전통 한복 천 위에 채색한 작품들이다. 사적 기억과 물질의 층위를 새로운 표면으로 변형했다. 이는 방 작가가 오랫동안 탐구해 온 ‘내 나름의 리얼리즘’ 시선과 사회적 비평을 확장하는 동시에 규격화된 사각 프레임을 넘어서는 또 다른 가능성이다. 무엇 하나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도 예술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