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는 뿌리 깊은 주거 불평등의 결과물

■민달팽이 분투기/지수
주거 불안 시달리는 청년 현실 고발
세입자 권리 보장 않는 허술한 제도
전세사기는 사회적 재난, 구조 문제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2025-11-09 09:00:00


지난해 11월 부산 전세사기 피해자 대책위가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전세사기 가해자 엄중 처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연합뉴스 지난해 11월 부산 전세사기 피해자 대책위가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전세사기 가해자 엄중 처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연합뉴스

달팽이는 집이 있는데 민달팽이는 집이 없다. 그래서 민달팽이는 ‘집 없는 청년’을 뜻하는 상징적인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2023년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만 19세 이상 34세 이하 청년 가구의 80%가 세입자로 산다. 청년 세입자로 머무는 기간은 점점 길어지고, 지하방 옥탑방 고시원 같은 열악한 공간에 내몰리는 청년 주거 빈곤층도 늘고 있다. ‘집다운 집’을 마련하기 위해 빚을 짊어진 청년들은 최근 들어 갭투기꾼들의 표적이 되었고, 2023년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된 전세 사기 피해자가 3만 명을 넘어섰다. 피해자 중 75%가 20·30대이다.

현실이 이런데도 우리 사회는 청년들이 세입자로서 겪는 고통과 불안을 심각한 사회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다. 전세 사기는 많은 청년들을 파산과 절망으로 내몰고, 심지어 극단적 선택까지 발생했다. 그러나 미숙한 사회 초년생들이 겪는 개인적 불행으로 치부하고 지나간다. 주택임대차 시장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지 않는다.

이 책은 2016년부터 10년째 청년들의 주거 상담과 교육, 정책 제안, 세입자 권리 확대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온 주거권 활동가의 기록이다. 청년 주거권 단체 ‘민달팽이유니온’에서 활동한 저자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청년 세입자들이 겪는 주거 문제를 고발하고, 더 나은 집의 미래를 모색한다.

책의 시작은 저자가 당한 경험이다. 4년 동안 살던 하숙집에서 갑자기 쫓겨나야 했다. 전봇대에 붙은 ‘하숙생 구함’ 전단지를 보고 찾아가 방을 둘러봤고, 집주인은 대학교 이름, 학부, 학번, 전화번호, 엄마 전화번호를 적으라고 했다. 이게 계약의 전부였고, 제때 월세만 내면 되는 줄 알았다. 당시 무엇이 문제인지 몰랐다. 그러다 집주인이 다음 달부터 월세를 크게 올리겠다며 못 내겠으면 나가라고 했다. 깨끗한 새 방으로 업그레이드 하는 거니 이 금액이 나쁘지 않다며 계속 살 건지 나갈 건지 선택하라고 했다. 정식으로 주택임대차 계약을 맺은 것도 아니어서 보장된 거주 기간도 없었고 그냥 나가라면 나가야 했다. 막막한 그때 민달팽이유니온이 운영하는 청년 주거 공동체 달팽이집을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주거권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저자는 청년들이 집 때문에 겪는 고통은 개인의 불운이나 능력 탓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주거 불평등 구조가 낳은 결과라고 강조한다. 상품이나 금융 자산이 되어버린 집을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로 봐야 하고, 사회 전체가 논의하고 공적인 차원에서 해결할 문제라고 말한다.

청년 세입자는 집을 구하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불평등한 현실을 마주한다. 불법 건축물과 최소한의 주거 기준조차 충족하지 못한 집들이 시장에 넘쳐 나고, 돈이 부족한 청년들은 열악한 공간을 전전한다. 계약의 공정성을 보장해야 할 공인중개사는 집주인의 편에 서서 세입자에게 부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집주인은 보증금을 제때 돌려주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되레 피해자를 탓한다. “그런 집을 계약한 것이 문제다” “본인이 부주의해서 당했다” 같은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책은 부조리한 관행이 지배하는 임대차 시장의 민낯을 드러내며 사회적 통념에 정면으로 맞선다. 전세 사기는 세입자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허술한 제도가 만들어낸 비극이며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발생했다는 것이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 이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역할과 책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집은 물리적 공간을 넘어 ‘관계 맺음’과 ‘돌봄’의 터전이다. 쫓겨나지도, 쫓아내지도 않는 집,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자 내일을 준비할 최소한의 시간, 자신을 치유하고 존엄을 회복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소유하지 않아도 머물 수 있고 서로 돌볼 수 있는 권리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저자는 함께 늙어갈 자리로서 집을 꿈꾼다. 동네 친구들과 저녁 한 끼를 같이 먹고 필요한 공구를 빌릴 수 있으며 장 본 재료를 나누어 갖고, 공원이나 하천 주변을 산책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에게 집은 내가 나를 돌보는 공간이고, 우리 공동체와 돌봄을 주고받는 장소여야 한다. 지수 지음/교양인/260쪽/1만 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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