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의 종말, 그 이후의 그림은…

정해민 ‘맞물리어 반짝이는’
아리안갤러리 6일까지 전시
디지털 이미지에 붓질 섞어
레고처럼 연결되는 작품도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2025-03-02 13:56:08

정해민 ‘맞물리어 반짝이는 06’. 아리안갤러리 제공 정해민 ‘맞물리어 반짝이는 06’. 아리안갤러리 제공

기술이 발달하며 기계가 인간 노동자를 대체하기 시작했고, 인간은 이후 인간만이 잘할 수 있는 영역을 고민했다. 많은 이들이 창의력이 바탕이 되는 예술 세계는 아마도 가장 늦게까지 기계에 뺏기지 않을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0세기 말 회화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예술조차 종말 선언이 나왔다. 회화의 종말 그 이후를 살아가야 할 미술인들의 심각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40대 정해민 작가는 현실적인 이유로 20대 초반부터 컴퓨터를 활용한 이미지와 그림 그리기에 빠져들었다. 작업실을 구할 형편이 되지 않았고, 좁은 공간에서 캔버스와 도구를 펼쳐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결국 작은 방 책상 위에 컴퓨터와 프린트, 채색 도구만 가지고 자신만 할 수 있는 작업에 뛰어들었다. 먼저 컴퓨터를 이용한 그림에서 대한민국 최고가 되고자 마음먹었다. 뻔히 보이는 디지털 이미지나 그래픽이 아니라 화가의 붓질과 질감, 깊이와 감동이 있는 채색까지 고스란히 컴퓨터를 통해 만들어내고자 했다.

그렇게 자신만의 디지털 회화 기법을 통해 이미지를 출력한 후 작가는 그 위에 붓을 들어 직접 그림을 그리고 색을 올렸다. 아마도 회화의 종말 이후 나올 전업 작가의 그림과 선택을 미리 선보인 셈이다. 여러 개의 이미지를 콜라주처럼 컴퓨터로 작업한 후 작가는 붓을 들고 천 년을 이어 온 전통 회화 특유의 질감, 색으로 작품의 변화를 끌어낸다.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고, 사진과 회화를 오가며, 그린 것을 지워내고 다시 그렸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던 20세기 말 포스트 모던 추상 회화에서 정 작가는 디지털을 더해 한 발짝 더 나간 것 같다.

부산시 해운대구 달맞이길 아리안갤러리에서 진행 중인 정해민 작가의 개인전 ‘맞물리어 반짝이는’이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리안갤러리 최정경 대표는 창원과 부산에서 꽤 오래 갤러리를 운영했다. 미술사에 의미 있는 작품을 남길 작가를 발견하고 그 작가를 지원하기 위해 갤러리를 시작했다는 최 대표. 작가 선정을 까다롭게 고려하는 최 대표가 “정해민 작가의 작품을 보고 대화를 하며 갤러리를 시작했을 때 마음이 떠올랐다. 감동이다”라고 말한 것도 정 작가가 가진 고유한 매력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해민 ‘반짝이는 벽에 맞물린 얼굴’. 아리안갤러리 제공 정해민 ‘반짝이는 벽에 맞물린 얼굴’. 아리안갤러리 제공

정해민 ‘맞물리어 반짝이는 02’. 아리안갤러리 제공 정해민 ‘맞물리어 반짝이는 02’. 아리안갤러리 제공

전시 제목 ‘맞불리어 반짝이는’은 디지털 회화와 아날로그 회화를 맞물리며 작업하는 작가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다. 먼저 생성된 화면과 나중에 붓으로 채색한 면이 겹치기도 하고 일부러 반짝이는 코팅 효과를 내는 바니시를 두껍게 바르기도 한다. 두 개의 얼굴이 맞물리기도 하고 기하학적인 패턴과 얼굴이 앞서거니 뒤서거나 하는 것처럼 보인다.

디지털 회화, 아날로그 회화는 대립 혹은 화합이 아니라 그렇게 그대로 있는 것 같다. 정 작가는 ‘이건 왜 이렇게 그렸냐’ 혹은 ‘이건 왜 넣었냐’라는 질문에 ‘그냥요’라고 답했다. 세상에 여러 생김의 사람들이, 여러 성격, 여러 형태로 어울려 살아가는 것처럼 정 작가에게 작품 속 요소들은 그저 그렇게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정 작가의 작업에 또 하나의 특별한 점이 있다. 작가는 작품을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특정 방향이나 사방으로 여러 작품들이 연결될 수 있도록 제작했다. 작가는 이를 ‘모듈’이라고 표현했다. 정 작가는 “어렸을 때 만지작거렸던 레고 블록 같은 것이다. 그림들이 맞물리기도 하고 각자 떨어져 독립성을 가질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전시도 전통적인 회화가 벽에 딱 붙어 전시되는 것과 다리 설치의 한 형태로 회화를 전시한다. 반만 붙어 있다거나 캔버스를 두루마리처럼 길게 펼쳐 끝은 자연스럽게 말려 있다. 두 개의 그림이 벽의 구석에서 만나기도 한다.


정해민 작가 전시 전경. 아리안갤러리 제공 정해민 작가 전시 전경. 아리안갤러리 제공

정해민 작가 전시 전경. 아리안갤러리 제공 정해민 작가 전시 전경. 아리안갤러리 제공

정해민 작가 전시 전경. 아리안갤러리 제공 정해민 작가 전시 전경. 아리안갤러리 제공

작업실이 없어 디지털 회화로 빠졌던 작가는 내공이 쌓여 이젠 30m짜리 디지털 회화를 캔버스에 출력해 전시하기도 한다. 물성이 없고 질감이 없는 디지털 회화에 물감 덩어리를 쭉 늘이거나 짓이기면서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실재감을 넣어준다. 작가는 이제 디지털과 물리적 세계 사이의 구분을 넘어 자신의 회화 형식의 탐구에만 관심이 있다고 했다.

이 전시는 3월 6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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