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집도, 생계를 꾸릴 방법도 다 타버렸어요.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합니다.”
김병욱 씨는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태마을에서 25년째 곶감 농사를 지어 왔다. 그러다 이번 산청·하동 산불로 집과 곶감 농장을 모두 잃었다. 농장에서 꽤 떨어진 감나무밭에도 불이 붙어 감나무 130여 그루가 불에 타버렸다. 말 그대로 삶의 터전이 모두 한순간에 잿더미가 된 것이다.
중태마을은 이번 산불 최대 피해 지역 중 하나다. 마을 가장자리에 위치한 김 씨의 곶감 농장은 폭격을 당한 듯 폐허가 됐다. 대형 공장에서 사용되는 H빔 철골이 산불 열기에 녹아 엿가락처럼 휘어졌을 정도다. 김 씨는 “산불 이후 계속해서 대피소에서 먹고 자고 있다. 다시 일어나려고 해도 어느 부분부터 손을 대야 할지 너무 막막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산불로 올해 곶감 농사는 꿈도 꿀 수 없게 됐다. 지리산 곶감 농사는 10월 말께 시작된다. 장마철까지 감안하면 당장 농장을 철거하고 건물을 새로 지어야 한다. 하지만 시천면이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면서 피해 조사를 마친 뒤에야 철거 절차를 밟을 수 있다. 시간과의 싸움까지 해야 하는 셈이다.
김 씨는 “곶감은 산청 특산물이지만 대부분 영세하고 나이 많은 농민이 농사를 짓고 있다. 속도감 있는 지원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살아갈 방법이 사라졌는데 저리 대출·융자를 이용하라는 건 삶을 포기하라는 말과 같다”고 강조했다.
인근 황민철 씨의 지리산 양봉농가도 재기할 생각에 막막하긴 마찬가지다. 10년 전 귀농하며 마련한 농장에는 산불로 다 타버린 벌통 100군(통)의 흔적만 남았다. 일반적으로 벌통 1군에 꿀벌 6만 마리 정도가 들어있는데, 600만 마리가 죽거나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산불을 피해 도망갔던 벌들이 하나둘 돌아오고 있지만, 이들을 반기는 건 시커멓게 탄 밀랍 뿐이다. 운이 없게도 산불이 나기 전날 90통을 새로 들였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됐다.
벌을 구해 온다 해도 그 뒤는 더 문제다. 지리산에 퍼져있던 밀원 식물까지 모두 타버려서 꿀을 딸 곳 자체가 사라졌다. 벌은 꿀을 빨 수 있는 밀원 식물이 없으면, 죽거나 멀리 사라져 버린다.
황 씨는 “최근 2~3년 동안 꿀벌이 계속 폐사해서 어려움이 이어지다 올해 조금 회복기에 들어가 들떠 있었는데, 산불이 모든 걸 앗아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가슴을 쳤다.
이번 산불로 산청군에서는 4000여 명이 대피했고, 주택과 공장 등 84곳이 소실됐다. 대다수는 집으로 돌아갔지만, 집을 잃은 20여 명은 대피소 생활을 이어가는 중이다. 아예 집을 버리고 가족이나 친지를 찾아간 사람까지 포함하면 실제 이재민은 더 많을 것이란 말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