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 | 2025-03-31 16:05:59
‘임윤찬 신드롬’이 지난 28일 개막한 통영국제음악제 초반을 뜨겁게 달궜다. 임윤찬으로 시작해 임윤찬으로 마무리한 첫 주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21)은 ‘스쿨 콘서트’를 비롯해 개막 공연 협연, 리사이틀까지 세 차례 무대에 올랐다. 하늘을 찌를 듯한 임윤찬의 인기가 통영국제음악제에 득(得)이 될지, 실(失)이 될지 현재로서 가늠하긴 어렵지만 비상한 관심을 끈 건 사실이다.
시작은 지난 28일 오전 11시 경남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에서 시작한 스쿨 콘서트였다. 이날 임윤찬은 파비앵 가벨이 지휘한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와 함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연주했다. 연주복 차림이 아닌 캐주얼 복장 그대로였다. 이 곡은 통영국제음악제 개막 공연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본 공연에 앞서 통영 관내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먼저 선보인 것이다. 이 공연은 통영 학생들만을 위한 특별 행사였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콘서트홀(1309석) 수용 인원 3배 이상이 참가를 문의하면서 공개 추첨을 진행했을 정도이다.
스쿨 콘서트는 통영국제음악재단이 2014년부터 추진해 온 교육 프로그램이다. 부산의 한 공연기획자는 “오는 6월 개관을 앞둔 부산콘서트홀도 지명도 높은 정명훈 예술감독이 있으니 이런 시도를 해도 좋을 것”이라며 말했다.
임윤찬의 인기는 본인이 출연한 공연은 물론이고, 이후 사흘간 계속된 다른 공연에도 적잖이 여파를 미쳤다. 관객층이 한층 대중적으로 변했다.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 연주에선 거의 보기 드물었던 악장 사이 중간 박수가 터져 나오는가 하면, 휴대폰 벨 소리와 카카오톡 알림음도 간간이 들리기도 했다.
통상 음악제 초반 초청되던 타 기관 공연 관계자를 거의 만나기 어려웠던 것도 올해의 진풍경이다. 직접 입장권 구매에 나섰던 음악 관계자들도 “티켓팅에 실패했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현장 취재에 나선 기자들도 30일 오후 7시 임윤찬 리사이틀의 경우, 표를 구하지 못해 매체 간 희비가 엇갈렸다. ‘임윤찬 피아노 리사이틀’이 58초 만에 매진되고, 바로 이어 2초 뒤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 I’이 매진된 덕분이다.
폭발적인 신드롬만큼이나 임윤찬의 음악적 성취도는 높았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협연한 개막 공연(부산일보 3월 31일 자 17면 보도)은 말할 것도 없고,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프로그램을 들고나온 독주회는 임윤찬의 개성과 창의성이 도드라져 그의 진가를 다시금 확인케 했다. 개막 공연을 함께한 파비앵 가벨 지휘자는 임윤찬에 대해 “이렇게 어린 나이에 테크닉뿐 아니라 음악적으로 성숙한 연주를 보여주는 데 깜짝 놀랐다”며 “그는 음악을 대하는 자세나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소통하면서 음악을 만들어 나가는 자세가 매우 겸손해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이어 ‘천재’(prodigy)라는 말로 극찬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임윤찬이 2022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꾸준히 연주 의지를 밝힌 곡이다. 두 개의 아리아 사이에 30개의 변주곡이 있는데 도돌이표, 곡과 곡 사이에 두는 시간 등으로 피아니스트마다 연주 시간이 크게 차이가 난다. 임윤찬은 작곡가 친구(이하느리·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에게 직접 위촉한 신작 ‘…라운드 앤드 벨버티-스무드 블렌드…’(…Round and velvety-smooth blend…)를 5분에 걸쳐 연주한 뒤 오후 7시 8분께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오후 8시 26분께 연주를 마쳤으니 80분가량 걸렸다. 제법 긴 시간에도 불구하고, 연주는 물 흐르듯 담백하다가 절정으로 치달았다가, 다시 고요한 명상의 순간으로 되돌아오는 등 사람들 가슴을 쿵쾅쿵쾅 치다가도 살살 어루만졌다.
열광적인 환호와 박수갈채 속에 연주를 마친 임윤찬은 앙코르도 들려줬다. 대곡을 연주하고 나면 앙코르는 가끔 생략하는데 임윤찬은 달랐다. 무심한 표정으로 피아노에 다시 앉더니 왼손만으로 단 32개의 음을 연주하고 무대를 떠났다. 그가 건반에서 손을 떼는 순간, 공연장엔 정적이 흘렀고, 골드베르크 변주곡 아리아의 32마디 베이스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아주 깔끔한 마무리였고, 관객의 허를 찔렀다.
임윤찬은 이 곡으로 올해 내내 전 세계 투어에 나선다. 특히 다음 달엔 파리, 빈, 런던, 아부다비, 앤아버, 그리고 뉴욕 카네기홀 연주로 이어 가는 대장정을 앞두고 있어서 국내 팬들은 앞서 이 곡을 감상한 셈이다. 공연을 관람한 청중들도 “연주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서울서 5시간 이상 운전해서 온 보람이 있다” 등으로 호평했다.
이날 임윤찬은 첫 곡 신작 연주를 마친 뒤 객석에 앉아 있던 친구이자 작곡가인 이하느리를 무대 위로 불러냈는데, 이땐 또 영락없는 20대 청년 모습이었다. 이하느리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청중에게 인사를 시키는 모습에서 객석에선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임윤찬 덕분에 너무나 행복한 시간을 보낸 이들도 많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아쉬운 목소리도 흘러나왔다. 해마다 봄이면 거의 안 빠지고 통영을 찾았다는 한 작곡가는 “임윤찬의 출연이 득인지 실인지 잘 모르겠는데, 덕분에 개막 주말 공연 티켓을 거의 구하지 못해 통영에 올까 말까 망설였다”면서 “굳이 임윤찬이 아니더라도 통영국제음악제는 음악 하는 사람들한테 인기가 있는데 굳이…”라며 말을 아꼈다. 그는 또 “더욱이 실시간 스트리밍된 유튜브 중계의 경우도, 임윤찬이 나온 대목(개막 공연 경우)만 제외해 속상했다”고 전했다.
임윤찬 공연이 있던 날,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 로비에선 “표 구합니다”라는 손팻말을 든 사람들도 보였고, 로비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를 통해 관람하는 이들도 전에 없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논란에 대해 진은숙 통영국제음악제 예술감독은 “하늘을 찌르는 인기에 티켓을 구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면서도 “통영국제음악제는 윤이상 선생의 음악을 조명하는 것 못지않게 한국 출신의 연주자를 배출하고 그들을 계속 도와주는 것도 중요한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임윤찬은 2019년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 최연소(15세)로 우승해 통영과 인연이 깊다.
김소현 통영국제음악재단 예술사업본부장은 “진짜 걱정은 임윤찬이 나오는 두 개 공연만 잘 나가고 나머지는 안 될까 봐 걱정했는데, 다른 공연도 함께 반응이 좋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덧붙였다.
김일태 통영음악재단 대표도 “매년 주 초반과 마지막 주말 사이에 끼어 있는 주중 공연 매표가 걱정인데 올해는 초반 탄력이 주중으로 이어지는 조짐이 있어 내심 기대가 크다”고 전했다. 2025 통영국제음악제는 4월 6일까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