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 2024-10-05 09:56:20
데뷔작 ‘구미호’ 이후 어느덧 30년. 정우성은 믿고 보는 배우를 넘어 한국 영화계를 염려하고 수호하는 ‘영화인’으로 자리했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잘생긴 얼굴 때문에 그의 연기는 오히려 늦게 주목받았다는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영화계 인사들을 자주 만난다. 정우성 배우 외에도 연출자(영화 ‘보호자’ 감독)로도, 제작자(넷플릭스 ‘고요의 바다’)로 확장하며 영화에 대한 강렬한 사랑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3일 열린 2024 부일영화상에서 영화 '서울의 봄' 이태신 역으로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받았다. 일본에서 배우 현빈과 영화 ‘메이드 인 코리아’(우민호 감독, 내년 디즈니플러스 방영 예정)를 한창 촬영 중이라는 정우성은 영화상 시상식에 참여하기 위해 급하게 부산을 찾았다. 정우성을 만나 상을 받는 소감부터 30년 영화 인생과 철학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부일영화상은 이번에 처음 받게 되었는데 역사성이나 공정성, 심사의 치열함이 영화계엔 잘 알려져 좀 더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상이 주는 부담감, 책임감은 분명히 있지만, 이건 저 혼자 잘했다기보다 함께 한 배우와 우리 팀에 대한 격려라고 생각합니다.” 정우성은 이어 “김성수 감독님은 특히 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특별한 인연을 가진 선배이자 감독님인데 그분과의 작업에서 이렇게 좋은 상을 받았다는 게 뿌듯합니다”라고 전했다.
정우성은 영화 ‘서울의 봄’(감독 김성수)에서 군인 정신이 투철하고 강직한 인물 이태신을 열연했다. 극 중 이태신은 육군 내 사조직을 키우던 보안사령관 전두광(황정민)의 영입 권유를 단칼에 끊어내고 쿠데타 세력에 끝까지 맞선다.
1979년 12월 12일 일어났던 ‘12·12 군사반란’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역사가 스포일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관객은 이미 전두광과 이태신의 대립의 승자를 알고 영화를 보게 된다. 영화 게시판에는 “결과를 알고 보는데도 뒷목 잡는다” “태신이 형이 끝까지 이기기를 바랐는데…”라는 댓글이 줄줄이 이어졌다. 공교롭게 2024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후보로 ‘서울의 봄’ 두 주역인 황정민, 정우성이 나란히 올랐고 뛰어난 연기력을 자랑했던 두 배우는 남우주연상을 놓고 또 한 번 피 튀기는 전쟁을 했다. 영광의 주인공은 결국 정우성이 차지했으니 이렇게라도 이태신이 전두광에게 복수를 하며 마지막으로 웃은 셈이다.
“영화를 준비할 때 전두광 역할이 너무 튀어 이태신은 묻히는 것이 아니냐는 걱정을 주변에서 들었습니다. 저는 그런 걱정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전두광 캐릭터가 공감을 사면 이 영화가 말하려는 메시지가 묻히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습니다. 다행히 관객들이 영화를 보며 함께 공분하시고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반응이 많더라고요. 이런 반응이 결국 이태신을 인정하고 응원해 주셨다는 뜻이지 않을까요?”
데뷔 30주년을 맞은 만큼 이제 영화 현장에선 대부분의 감독과 배우, 스태프가 정우성의 후배이다. 그럼에도 정우성은 후배 감독과 배우, 스태프에게 깍듯이 대우하고 살뜰하게 챙기기로 유명하다. 정우성과 함께 일해본 이들은 다들 참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는 이유이다.
“데뷔 30년은 내 개인의 경험일 뿐이지 현장에서 그들에게 나의 경험이나 의사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새로운 영화에선 저 역시 초보이기에 나를 우선시한다거나 나의 경험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선배로서 배려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서울의 봄’은 많은 분량을 부산에서 촬영했다. 정우성은 영화 촬영을 위해 그동안 부산을 자주 찾았고 부산의 뛰어난 영화 촬영 인프라에 감동한다고 했다. 세트장도 잘 준비돼 있다고 덧붙였다. 부산이라는 도시는 정우성에게 굉장히 매력적인 곳이라며 가끔 서울에서만 살 필요가 있나 부산에서도 한 번쯤 살 수 있지 않냐고 생각할 정도로 부산을 사랑하게 됐다.
2022년과 2023년 정우성의 영화와 드라마들이 줄줄이 쏟아졌다. 왜 그렇게 황소같이 일을 하냐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우성은 팬데믹으로 인해 일정이 늦어지며 개봉들이 겹쳤다며 촬영은 이전에 끝난 것들이라고 해명했다.
“20대 때는 한 작품이 끝날 때까지 시나리오조차 받지도 않았어요. 왜 그렇게 고지식했나 싶어요. 그래서 20대 때 더 많은 작품에 참여하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합니다. 그 나이 때 할 수 있는 역할들이 있으니까요. 이젠 어떤 역할이 오면 망설이지 않고 뭐든 도전하려고 합니다.”
경력이 오래될수록 작품 수를 줄이고 역할에 대한 고려 시간도 길어질 수도 있다는 말에 정우성은 “권투 선수는 쉴 때도 링에서 쉽니다. 링에서 밑으로 내려가지 않아요. 저 역시 현장이 가장 즐겁게 재미있습니다. 배우로도, 감독으로도 현장을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라며 유쾌하게 답했다.
정우성과 이정재는 한국 영화계 대표 배우면서 동시에 워낙 절친한 관계로 인해 한국 영화계 공식부부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이다. 이번 부일영화상 레드카펫에도 두 사람이 나란히 입장하며 또 한 번 절친임을 인증했다.
“정재 씨와는 서로 비슷한 구석도 있고 적당히 다르기도 하죠. 그런데 적당한 거리감, 선이 있어요. 그걸 알고 잘 지키니까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수상을 축하해줬어요.”
30년이나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 특별히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비결은 없어요. 스스로를 잘 받아들이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는 관객들이 좋아해 준 작품 속 인물을 빨리 놓아주려고 합니다. 그게 내 거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늘 다시 시작하려고 했어요. 아무리 사랑받는 영화라고 해도 그 이미지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이번 영화의 역할은 안 멋지다고 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그때 그 모습을 그리워 해주시기도 하더라고요. 참 감사한 일입니다.”
앞으로 정우성이라는 배우는 어떻게 살아갈까라는 질문에 정우성은 “잘 변해야죠. 다음에 어떤 도전을 할지 모르지만 그 어떤 도전이라도 새로운 마음으로 또 시작할 것 같습니다. 영화 현장에 가능하다면 오래오래 일하고 싶습니다.”
다양한 영화를 통해 정우성의 지난 30년을 많은 이들이 함께했지만, 새로운 시도와 현장을 무척 좋아하는 천생 영화인 정우성은 앞으로의 30년이 더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