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 2024-11-14 11:04:26
무엇인가를 그린다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 인류의 탄생과 동시에 시작되었다고 추측한다. 고대 사람들은 벽에 동물을 그리고 창을 던져 사냥의 성공을 빌었다는데 이렇게 미술은 처음 주술적인 의미로 인류사에 등장한다. 그러다가 명암법, 투시법 등 그리는 기법이 발전해 대상과 얼마나 비슷하게 그릴 수 있느냐로 집중된다. 하지만 사진의 발명과 함께 미술은 무엇인가를 재현한다는 고유한 지위를 넘겨주고, 이에 따라 재현이 아닌 표현의 방식을 모색한다. 미학자들은 “20세기가 넘도록 계속된 재현은 종료됐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21세기 초 마치 사진 같은 그림 ‘극사실주의’가 유행하며 재현미술은 잠시 미술계에 등장했지만, 열기는 금새 사그라들었고 이후 재현미술은 철 지난 양식으로 인식되었다.
유행 지난 것 같은 재현미술을 놀라운 재능으로 꿋꿋이 이어가는 한국 작가가 있다. 한영욱 작가는 대놓고 재현미술은 오히려 미래의 양식일 수도 있다고 반박한다. 한 작가는 “미술이 현재의 독립적인 지위를 갖게 된 이후로 재현은 한 번도 제대로 진지하게 연구되지 않았다. 이제부터라도 본격적으로 모색해야 할 미래의 양식이며 최근 영미권을 중심으로 ‘이미지올로지’ 연구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신감 넘치는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 한 작가의 그림은 감탄이 나올 만큼 사실적으로 섬세하다. 심지어 캔버스가 아니라 알루미늄판에 기계로 긁어서 표현하는 데 일반적 그림이 표현하는 사실적인 묘사 이상의 특별한 분위기까지 전달한다. 작가는 유독 인물을 많이 그리는데, 실제 인물 혹은 사진을 보며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작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이다. 신기하게도, 이 인물은 어딘가에서 본 것 같고 심지어 익숙한 느낌마저 든다.
부산 해운대구 OKNP에서 24일까지 열리는 한 작가의 개인전 제목은 ‘재현미술을 위한 제언’이다. 올해 신작과 더불어 그동안 한 작가가 그린 다양한 형태의 그림을 한곳에 모았다. 인물은 물론이고 동물 군상 풍경 등 재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의 종류를 다 만날 수 있다.
갤러리에는 작가가 작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마치 치과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미세한 장비들을 사용해 알루미늄판을 긁거나 새긴다. 알루미늄판에 새겨진 그림은 일반적인 캔버스 그림과 다르게 빛이 부딪치고 반사되며 작가만의 독창적인 재현 미술로 완성된다. 알루미늄판 자체의 색을 그대로 살리기도 하고 색을 칠한 작품도 있다. 무엇보다 머리카락이나 주름 등의 표현을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묘사가 뛰어나다.
극사실주의 전시는 아트페어에서 한두 점씩은 볼 수 있으나 이렇게 많은 작품이 등장한 전시는 오랜만이다. 새삼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이 얼마나 부러운 재능인지 느껴진다. 현대 미술은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말이 있는데, “와! 그림 진짜 잘 그린다”라고 감탄하며 누구나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