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 2025-02-13 13:59:38
한국인으로서 미국에서 기자 생활을 한다면 어땠을까. 재미저널리스트 안희경이 쓰는 글을 보면서 그런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다. 그는 놈 촘스키, 재레드 다이아몬드, 장 지글러, 스티븐 핑커, 지그문트 바우만 같은 책에서나 본 세계 지성을 직접 만나 3부작 기획 대담집을 완성했다. 세계의 중심 미국에선 만나는 사람의 수준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 능력에, 미국에 오래 살았으니 영어 실력은 당연히 탁월할 것으로 짐작했다.
책에는 뜻밖에도 영어와 관련한 솔직한 고백이 담겼다. “지금도 내 유려한 한국어에 한참 못 미치는 영어 때문에 날 부족하게 보도록 상대에게 권한을 넘기는 것 같은 착잡함을 떨치기 어렵다.”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그의 미덕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국 농촌에 사는 베트남 여성은 자신보다 더한 감정을 느꼈을 거라고 한발 더 나아가는 데 있었다.
<인간 차별>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날 서 있는 ‘차별’을 녹이는 가치와 태도를 제시하는 논픽션이다. ‘나는 누구인지’ 정체성을 묻게 하는 상황에서 시작해 ‘각자는 고유한 인간이다’라고 깨닫기까지 20여 년간 이민자로서 겪은 경험이 살아 있는 언어로 아프게 담겼다. 한국에 살다 32세에 미국으로 이주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다음의 문장에 잘 나타나 있다. 미국 이민은 서른 살이 넘어 입학하는 유치원이었다. 이전에 성취한 것을 빨리 잊어야 어른이 될 수 있었다. 아이들도 또래보다 빨리 어른이 되었다. 오죽하면 이민 전 삶을 전생이라고 부르는 사람까지 있었을까. 시간이 지나 남의 땅에 적응했어도 곁방에 세 들어 사는 느낌은 여전했다. 드디어! 밥을 나누고 생각을 나누는 친구들이 늘어가며 남의 땅이 아닌 우리 동네에서 살게 되었다는 대목이 뭉클하게 느껴진다.
지금도 귀에 익숙한 “사장님 나빠요”는 2004년 블랑카가 했던 이야기다. “사장도 사장님, 사장 여동생도 사장님, 그 여동생의 남편도 사장님, 사장의 아버지도 사장님. 한국 사람은 다 사장이야.” 4년 차 이주노동자가 노래하듯 말하는 데 8년 차가 화음을 쌓듯이 끼어든다. “우리 회사는 운전사도 사장님이야.” “맞아. 일하는 사람은 우리 외국인 네 명뿐이지.” 이주민이 직접 만든 다큐멘터리 ‘형들의 이야기’에 나오는 장면이다. 한국의 이주노동자는 130만 명, 주민등록인구의 4%가 외국인이다. “사장님 나빠요” 이후 20년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이주노동자에게 모든 한국인은 지시를 내리는 윗사람이다. 이주노동자를 여전히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외국인 관리대상자로 취급하고 있다.
‘결혼과 이민이 매우 닮았다’는 저자의 깨달음을 어떤 남성도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을 것 같다. 이민은 출신 국가의 경제력이 친정 부모의 능력처럼 작용한다. 가난한 나라에서 결혼하러 오면 돈 벌러 왔다는 소리를 듣고, 부자 나라에서 와야 글로벌 가족이라고 불린다. “중국엔 달력 없죠?” 화가 날만큼 사람을 무시하는 발언을 듣고도 중국에서 온 홍리 씨는 “없다”고 부드럽게 말하고 넘어간다. 무시 발언 속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세상, 그 사람의 인식 한계가 담겼다. 차별은 의도하지 않은 곳에도 스며들 수 있으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
2018년 제주도로 들어온 예멘인 중 484명이 난민 신청을 했고, 지금까지 세 명만 난민을 인정받았다. 325명은 인도적 체류 허가라는 불안정한 위치에서 거주하고 있다. 2022년부터 우크라이나 고려인 피난민들이 들어왔다. 고려인이라고 해도 한국은 쉽사리 허락받는 피난처가 아니었다.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정부의 무관심이 겹치며 그들은 전쟁터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고 한다. 과연 난민은 우리와는 너무나도 먼 당신들일까. 난민 앞에 ‘피’자 한 글자를 붙인 피난민, 많이 들어 본 단어가 아닌가.
빛이 바랜 단어 ‘다문화’는 다양한 문화의 줄임말이다. 한국인끼리도 각자 다른 사고방식과 취향을 갖고 있으니 다문화다. 우리는 모두 다름을 안고 살아가지 않나. 낭만적 이상도 행동으로 옮기면 현실이 된다. 외면은 나의 어느 날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다르다. 다른 서로를 보살피며 살아가야 한다는 상식을 일깨워 준 저자에게 깊은 감사 인사를 전한다. 안희경 지음/김영사/272쪽/1만 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