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람들의 삶, 그건 곧 무대이자 영화다

■내 모든 것/오정미
영화 ‘버닝’ 각본가의 일상 속 보통 사람 이야기
짧지만 강렬한 글 13편에 담긴 사람들의 고백
배우 박정민 운영 출판사 '무제'가 발간한 도서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2025-10-26 09:00:00


영화 '버닝'의 시나리오를 쓴 오정미 작가가 첫 에세이 <내 모든 것>을 출간했다. 사진은 영화 '버닝' 스틸 컷. CGV아트하우스 제공 영화 '버닝'의 시나리오를 쓴 오정미 작가가 첫 에세이 <내 모든 것>을 출간했다. 사진은 영화 '버닝' 스틸 컷. CGV아트하우스 제공

2025년은 안식년이라고 발표한 배우 박정민은 아이러니하게도 생애 가장 바쁜 해를 보내는 듯했다. 초저예산 제작비, 출연료조차 받지 않고 1인 2역을 맡은 영화 ‘얼굴’은 대박 흥행을 기록했고, 무제 출판사 대표로 3권의 책과 오디오 북까지 만들었다. 이금희 작가의 <첫 여름, 완주>는 베스트셀러로 등극했고, 서울국제도서박람회의 무제 부스는 긴 줄이 생길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지난해 한강의 노벨문학상 이후 조용했던 출판계에 박정민은 고마운 존재였다. 박정민이 책을 추천하면 인기 도서로 등극하는 현상도 생겼다.

신간 <내 모든 것>의 서평을 박정민 이야기로 시작한 건 이유가 있다. 지난달 부일영화상에서 그를 만났다. 한국 초연 대작 ‘라이프 오브 파이’ 주인공이 된 걸 축하하며 너무 과로하는 거 아니냐는 안부를 건넸다. 최근 몇 달 하루도 쉬지 못했다는데, 10월에 무제에서 새 책을 또 낸다고 했다. 올해는 더 이상 책을 내지 않겠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의외의 소식이었다. 우연히 만난 원고에 반해 놓치면 안 되겠다 싶더란다. 그 원고가 <내 모든 것>이다. 책에 관한 자부심이 남다른 박 대표가 300페이지에 가까운 원고를 하룻밤에 다 읽었다니 새삼 책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만난 책은 판형이 독특하다. 성경책이 연상되는 가죽 표지에 요즘 잘 볼 수 없는 가름끈(어디까지 읽었는지 표시하는 끈)은 클래식하다. 지금은 사라진 낭만 같은 느낌이라 반가움에 미소가 지어진다.

저자는 영화 ‘버닝’을 쓴 각본가이자 영화감독이다. 자신이 만들 영화,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를 찾기 위해 고민하고 방황했다. 작품 취재를 위해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들에게 꼭 자신만의 영화 일명 ‘인생 영화’를 물었다. 영화에서 이야기가 시작됐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학대받은 이, 수백 명의 주검(삼풍백화점 참사) 위에 세워진 고급 주상 복합 아파트와 재난으로 숨진 이들에 대한 트라우마, 길냥이를 살리기 위해 애쓰는 할머니 캣맘, 가수의 욕망을 이루지 못한 채 외국의 호스피스 병동에서 노래 부르는 일을 하는 가수 지망생, 대소변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병든 아버지의 품위를 지켜드리기 위해 애쓰는 사람 등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의 기록이다.

온라인 서점에선 이 책을 ‘오정미 작가가 만난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 영화 이야기’ ‘버닝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오정미의 첫 에세이’라고 소개한다. 이 소개 글은 틀린 것 같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인터뷰일 수도 있고, 에세이일 수도 있으며 소설일 수도 있다. 책을 읽으며 계속 책의 정체에 관해 궁금해졌다. 실제 만난 사람의 고백인지, 저자의 창작으로 탄생한 단편소설인지, 인터뷰에 저자의 생각을 더한 에세이인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장르의 분류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이른다.

책에 담긴 13개의 글은 모두 짧지만 강렬하다. 각 이야기가 가진 흡인력이 대단하지만, 동시에 묵직한 울림이 있어 한 편을 읽은 후 한참을 쉬어야 다음 편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마치 목숨을 담보로 매일 밤 왕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바쳐야 했던 아라비안나이트가 생각날 정도였다. 283쪽 분량은 하루 만에 읽을 수 있지만, 한 편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결국 일주일 만에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수 있었다.

기자가 되었을 때 지인이 책의 한 구절을 보내준 적이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네가 모르는 전투를 치르고 있다. 친절하라. 그 어느 때라도’라는 글이었다. 기자로서 일할 때 항상 떠올리는 말이 되었다.

열세 편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주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이들이다. 저자는 삶의 무대에서 이름 없는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들의 고백을 통해 서사란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영화와 예술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문화부 기자로서 여러 예술가를 만났는데, 그들은 자신의 손을 떠난 작품은 관객에 의해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고 새로운 모양과 에너지를 얻는다고 말했다. 저자는 영화 만드는 삶을 늘 꿈꾸었다고 한다. 이 책을 쓰며 사람들의 삶 속으로 스며든 영화의 모습을 찾았으니, 저자의 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일 것 같다. 오정미 지음/무제/283쪽/2만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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