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 2025-02-24 14:01:00
베스트셀러 소설이자 OTT 시리즈로도 유명한 ‘파친코’. 일제강점기 시절을 담은 만큼 극적인 장면이 여럿 등장 한다. 그중 나의 마음에 콕 박힌 한 장면은 일본으로 떠나는 딸 선자를 위해 엄마가 준비한 선물, 따뜻한 밥 한 끼이다. 이 작품뿐만 아니라 다른 소설, 영화에서도 종종 “직접 지은 밥 한 끼 대접하고 싶다”는 대사를 통해 상대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배려를 표현한다.
인간 관계에서 밥 한 끼는 단순히 물리적인 실체를 넘어 많은 감정을 내포하고 있다. 부산에서 태어나 중학생 때부터 미술을 시작했고 이후 서양화 전공으로 학사, 석사, 박사까지 끝낸 후 전업 작가로 살고 있는 박주호. 박 작가는 2006년부터 밥 시리즈를 줄곧 이어오고 있다. 늘 먹었던 어머니의 밥이 어느 날 다르게 느껴졌단다. 그때부터 쌀과 그릇에 담긴 밥을 그렸다. 한 분야를 계속 파다 보니 어느새 ‘밥 작가’라는 별명이 생겼다.
“저는 실제 쌀 알갱이나 밥을 사진처럼 완전히 똑같이 그리지는 않습니다. 극사실주의로 불리는 그림이 아니죠. 저는 소재를 통해 은유하는 마음을 그립니다. 저의 그림에는 감정이 담겨 있고 작품을 보는 각 개인은 자신의 경험, 삶의 흔적과 맞물려 자신만의 정서를 찾게 됩니다.”
긴 세월 동안 밥 시리즈를 그렸지만, 단 하나도 같은 작품이 없는 것도 그림을 그릴 때의 감정, 밥에 담긴 정서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또 반복적으로 밥을 그리는 행위는 작가에게 쉽지 않은 끈기와 인내를 요구한다. 수행하는 반복적으로 쌀 알갱이를 그리며 작가는 그리는 행위에 집중했고, 노동처럼 느껴지는 반복적 행위는 내면의 고요함을 들여다보게 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1년에 1번 이상의 개인전을 여는 박 작가는 이번 개인전에서 변화된 밥 시리즈를 선보였다. 부산 해운대구 카린 갤러리의 박주호 ‘Awareness’(인식)전에서는 쌀의 형태감을 최대한 배제하고 흐려진 쌀 그림이 인상적이다. 마치 색면 추상을 보는 듯하다.
“전시회에서 만난 분들이 로스코의 색면 추상이 떠오른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번에는 형태보다 색에 집중했습니다. 색을 통해 내면의 깊은 곳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캔버스를 마주한 순간 자동으로 발산되는 에너지에 집중해 그림을 그린 것 같습니다.”
작가의 설명처럼 이번 전시에선 기존 박주호의 밥 그림과 많이 달라졌다. 마치 벚꽃이 날리는 것처럼 쌀 알갱이가 날아다니는 것 같은 그림도 있고, 세포 같기도 하고 살아있는 생명체같이 느껴지는 리드미컬한 동그라미들도 묘하게 눈길이 간다. 가볍고 연하게 색을 여러 번 올려 요즘 서양화와 다른 색깔의 느낌도 박주호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매력이다. 지하 2층에서 만나는 조각 설치작품은 서양화를 전공한 박 작가의 또 다른 재능을 엿볼 수 있다. 자코메티의 조각처럼 여리고 야윈 인간 조각이 한 알의 쌀을 끌고 가는 장면을 보면 관객은 각자만의 밥에 대한 의미를 다양하게 펼칠 수 있다.
중학생 시절 미술부 부장을 할 정도로 그림 솜씨는 일찍부터 인정받았지만, 박 작가는 여전히 치열하게 그림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물성, 질감, 형태, 색감, 표면, 소재 등을 계속 바꾸며 이 같은 변화를 전시에서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도 캔버스 외에 다른 소재 위에 그린 그림과 형태 변화 등을 시도한 작품도 함께 보여준다.
전시장 한쪽 면에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과 비슷하다”라고 적었다. 너무 집착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되지만, 끊임없이 관심을 주고 아껴주는 것, 적당히 거리두기를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너무 사랑하는 그림과 평생을 같이 가기 위해 작가가 스스로 찾은 방법이지 않을까.
박 작가는 박주호라는 이름 외에도 부캐릭터로 지난해부터 박미자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박주호가 하지 않을 것 같은 그림과 드로잉 작업을 했고, 지난해 박미자 전시는 성공적이었다. 카린 갤러리는 3월 2일까지 박주호 개인전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