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 | 2026-11-03 17:51:43
부산 오륜대순교자성지성당 1층 ‘성인 유해 참배실’에서 한윤식 신부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모래사장 위 칼을 찬 순교자의 형상을 띤 26위 성인의 위패가 눈길을 끈다. 김은영 기자
지난 7일 봉헌식을 가진 부산 금정구 오륜대순교자성지성당 외부 전경. 2023년 9월 기공식 후 3년 만의 완공이며, 좌측에는 기존 성지에 조성되어 있던 성모자상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김은영 기자
“천주교 신자들이 성지 순례하듯 오시기도 하겠지만, 부산 시민들도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오시면 좋겠습니다.”
3년여의 현대화 공사를 마치고 지난달 7일 새 성당 봉헌식을 한 부산 금정구 ‘오륜대순교자성지’ 담당 한윤식(보니파시오) 신부는 종교와 이념을 넘어선 성지의 보편적 의미를 이같이 강조했다. 천주교 성지이지만 시민 누구나 찾아와 마음을 돌아보고 쉬어갈 수 있는 ‘화해와 치유의 공간’으로 거듭나겠다는 뜻이다. 개관 이래 약 한 달간 미사 참여자만 1만 명을 넘어섰다.
1868년(무진년) 부산 수영 장대에서 순교한 이정식(요한)·양재현(마르티노) 복자를 모신 부산 금정구 ‘오륜대 순교자 성지’. 성지 입구 벽면에 두 복자의 흉상 부조가 모셔져 있다. 사진은 이정식 요한. 김은영 기자
양재현 마르티노. 김은영 기자
오륜대순교자성지는 1868년(무진년) 부산 수영 장대에서 순교한 이정식(요한)·양재현(마르티노) 복자를 비롯한 8위 순교자의 묘소와 한국 103위 순교 성인 중 26위의 유해를 모신 신앙의 터전이다. 1968년 한국순교복자수녀회가 분원을 세운 뒤 성지로 자리 잡았고, 시설 노후화에 따라 부산교구가 2023년 9월 기공식을 열어 3년 만에 완공했다. 전임 전수홍(안드레아) 신부의 마스터플랜을 한 신부가 이어받았으며, 부산교구 126개 본당 신자의 정성과 221만 단의 묵주기도가 모인 결과다.
오륜대순교자성지성당 뒤편 순교자 묘역. 병인박해 시기인 1868년(무진년) 부산 수영 장대에서 순교한 8인의 순교자 묘소가 조성돼 있다.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는 ‘복자’여서 묘비가 다소 큰 편이다. 김은영 기자
오륜대순교자성지성당 내 2층 대성전으로 향하는 25m 무장애 경사로 전경. 초대교회부터 그리스도인을 상징해 온 ‘물고기’ 모양의 나무 조각 1만여 개가 벽면을 채우고 있다. 성지 조성을 위해 마음을 모아준 이들을 기억하기 위한 공간으로, 맨 뒤쪽에는 두 주교의 물고기가 교우들을 든든하게 뒤따르며 이끄는 형상을 담아 따뜻함을 더했다. 김은영 기자
한 신부는 “이곳은 신앙 때문에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 가까이 있는 기억의 공간”이라며 “꼭 신앙이 아니더라도,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진리와 가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사람들의 삶은 누구에게나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시대와 공간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귀한 것을 찾고 지켜내고자 했던 사람들을 마주하며, ‘나 역시 무엇을 지키며 살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오륜대순교자성지성당 2층 대성전 내부 모습. 정면의 유리화(스테인드글라스) 너머로 순교자 묘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김은영 기자
새 대성당은 지하 2층·지상 3층 규모로, 기존 나무를 이식하고 뒤편 숲을 배경으로 남겨 노출 콘크리트 공법의 삭막함을 덜었다. 한 신부는 “설계의 핵심은 ‘덕지덕지 채우지 말고 비우자’는 것이었다”며 “대성전은 앉아서 기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십자가와 제대 뒤 스테인드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순교자 묘역, 그리고 예수의 수난부터 무덤까지를 묵상하는 십자가의 길 14처 외에는 종교적 형상이나 전자장비를 두지 않았다”고 말했다.
특히 제대 뒤 유리화 너머로 순교자 묘역이 그대로 보이도록 했다. 한 신부는 “신자들이 묘소를 바라보며 미사에 참여하고, 하느님과 화해하며 몸과 마음을 치유받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화해와 치유의 성지’라는 이름은 이 구상에서 나왔다.
양산 덕계성당에서 제공받아 부산 오륜대순교자성지성당 2층 대성전에 안치한 2m에 달하는 십자가 예수상. 김은영 기자
오륜대순교자성지성당 2층 복도의 스테인드글라스 설치 모습. 김은영 기자
오륜대순교자성지성당 1층 십자홀의 십자가. 새 성당 봉헌 전에 사용하던 십자가이다. 김은영 기자
오륜대순교자성지성당 1층 소성전을 장식한 ‘십자가의 길’ 14처 황동 부조. 독일의 고성당에서 이관된 후 오랜 세월 푸른 곰팡이로 덮여 있던 것을 손수 정성껏 닦아 정갈한 빛을 찾았다. 김은영 기자
성전 곳곳에는 독일과 국내 피정 시설에 있던 성물들이 재활용돼 제자리를 찾았다. 대성전의 예수상과 14처 작품은 양산의 성당과 피정 시설에서, 소성전 입구의 성모자상·요셉상·14처는 독일에서 온 것이다. 감실·독서대·스테인드글라스는 인보성체수도회 작가 수녀에게 의뢰해 제작했다. 대성전으로 향하는 25m 무장애 경사로는 성지 조성에 동참한 이들을 기억하는 1만여 개의 나무 물고기 조각으로 채웠다.
옛 박물관 자리에는 ‘천주교부산교구 역사박물관’이 11월 하순 개관을 목표로 준비 중이다. 한 신부는 “부산·경남 지역 천주교가 어떻게 수용되고 이어졌는지를 보여 주는 대사회적 교육·문화의 창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성지는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개방되며 오전 11시 대성전 미사가 봉헌된다. 월·금요일 오후에는 고해성사가 진행되고, 뛰어난 음향을 살린 소규모 음악회도 열릴 예정이다. 대성당 뒤편의 십자가의 길, 성모 동굴, 묵주기도의 길은 자연 그대로 보존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