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 | 2025-05-05 14:22:14
‘물질은 이야기, 장소는 기억’이란 말은 앙리 베르그송(1859~1941)의 철학적 개념을 담고 있는 문장이다. 한때 플라스틱을 녹였던 공장에서 싹트는 감정과 사유를 두고 작가들은 이렇게 명명했다. 부산 사상구 학장동의 오래된 플라스틱 재생공장 ‘일산수지’에서 지난 2일부터 오는 9일까지 ‘Plastic Factory-New Materialism’(플라스틱 공장-신물질주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공장은 2016년 폐업한 뒤 쭉 비어 있었고, 부산대 미술학과 석·박사 과정에 있는 젊은 예술가 11인이 의기투합하면서 일산수지에서 여는 세 번째 전시가 성사됐다. 2024년 가을에 열렸던 첫 전시에 참여했던 손몽주 작가가 이번엔 프로그래머가 되어 정안용 작가와 함께 기획했다. 전시 총괄은 부산대 예술대학 미술학과 학과장인 박현주(조소 전공) 교수가 맡았다.
“‘플라스틱 팩토리-뉴 머티리얼리즘’은 단순히 유휴공간을 활용한 전시가 아닙니다. 이곳은 비워진 공간이자, 한 시대의 상징이었던 공장이며, 지금은 예술이라는 새로운 에너지로 다시 살아나는 실험의 현장입니다. 젊은 예술가들의 손끝에서 비로소 다시 기운이 돌기 시작했으니까요.”
전시장에서 만난 박 교수, 손·정 작가, 그리고 손창안 사진가 겸 공간 제공자가 공간과 전시에 대한 의미를 설명했다. 일산수지는 손 사진가 부친이 하던 공장이었다. 공장은 아직 묵은 때를 벗지 못해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찌든 기름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지난해 전시는 이벤트성으로 공간을 한 번 쓰고 끝나는 거였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아서 몇 년 더 해 보자는 의지가 생긴 거죠.” “상업 공간이 아니어서 좀 거칠긴 해도, 실험적으로, 열정적으로 뭔가 해 볼 수 있겠다 싶었어요. 공장에서 전시하는 기회가 흔치는 않잖아요.”
‘플라스틱 공장-신물질주의’ 전시 제목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일산수지 장소 이름을 따서 ‘플라스틱 팩토리’라고 했고요. 플라스틱을 만드는 원재료 수지는 뭐든지 만들 수 있는 매체잖아요. 매체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면서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점도 고려됐어요. 재료가 다 다르면서 물질에 대해 이야기했고, 장소성을 스며들게끔 하면 재밌겠다 싶었습니다.”
참여 작가들은 모두 11명으로 저마다 개성을 자랑했다. 김미소는 ‘현대인I 철’ 작품을 공장 입구에 배치했다. 공장 안으로 들어서면 정안용의 ‘그대 지금 어디에 살 것인가’ 대형 걸개 족자와 영상(10분)을 만난다. 목공본드로 톱밥을 잔뜩 붙인 권자하의 ‘Bulge’(가득 찬) 피아노도 보인다. 익숙함을 해체하고, 형성 과정을 재조명하는 작업이다. 황인지는 폐현수막을 재봉 뒤 채색한 ‘다시 만난 세계’를 선보였다. 이종민은 ‘Eat me!’ 시리즈를 레진으로 만들었고, 안도경은 ‘13:43 타피스트리’를, 박선현은 비즈왁스로 ‘유기적 연결: 중간 과정’을 제작했다.
2층으로 올라가자 심건영이 수전과 물을 활용해 만든 ‘천칭’이 작동했다. 이무빈은 수지로 만든 대형 고양이가 붕어빵을 쫓는 소박한 일상을 다룬 ‘휘게 I, II, III’을 작업했다. 포장마차 작업으로 주목받은 김유빈은 헌 옷으로 만든 소풍 김밥 등 K다이닝과 100미터가 넘는 검은 봉지를 연결한 ‘김말숙(54세)의 부전시장 다녀온 장바구니’로 또다시 재치를 발휘했다. 구우희의 ‘사랑, 죽음, 발치 ll’는 사랑니 발치 스토리를 펼쳤다.
손 사진가는 “정식 개관은 내년으로 예상하고요, 지금은 파일럿 전시라고 보면 될 겁니다. 제가 독일에 있을 때 보고 느낀 건데, 빈 상가 같은 공간을 편하게 오픈해서 학생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게 참 좋았어요”라며 공간 활용을 고민 중이라고 전했다. 관람 시간 오후 1~8시. 전시 문의 010-8391-47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