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 2025-02-18 10:29:50
부산 수영구 망미동 주택가에 자리잡은 출판사 ‘비온후’를 찾아갔다. 오래 전부터 좋은 소문만 무성한 곳이다. 책방을 겸한 출판사의 전시공간 ‘보다’에서는 고양이 그림으로 알려진 박성옥 작가의 전시가 비온후 25주년 기념으로 열리고 있었다. 마음과 술을 주고 받으며 친구가 되었고, 작품이 좋아 하나 둘 간직하게 되었다는 전시 설명이 SNS에 보였다. 비온후와 미술 작가들과의 관계가 짐작이 되었다.
‘독립 출판’이란 용어는 2000년대 중반 한국 사회에 본격 등장했다. 비온후 김철진 이인미 씨 부부는 어쩌다가 독립출판이란 말도 나오기 전인 2000년에, 지금도 보기 드문 ‘2인 출판’을 시작할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진다.
두 사람은 건축 관련 잡지에서 같이 근무하며 만났다고 했다. 국문과를 나온 김 씨가 취재기자, 건축을 전공한 이 씨는 사진기자였다. IMF 외환위기로 한가해진 건축가들과 함께 모여서 건축 탐방을 다니다 전시를 했을 때였다. 귀중한 자료들이 한번 전시하고 사라지는 게 아쉬워 그들은 출판을 시작하게 된다. 출판은 돈이 안 된다는 생각 따위는 안 하던 젊은 시절이었다. 출판사는 아내 이 씨가 기획이나 사진을 찍는 바깥일, 남편 김 씨는 편집 디자인을 비롯한 집안일로 업무가 분담되어 있다.
비온후에서 나온 많은 책을 살피다 한 가지 공통 키워드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도시에 산다>, <터널과 다리의 도시, 부산>, <좌천아파트>, <부산 원도심에서 사람을 만나다>, <청춘 부산에 살다>, <부산 영화로 이야기하다>, <나를 찾아 떠나는 부산순례길>, <부산에 살지만>, <구석구석 부산>, <보수동>…. 수도권이 출판 매출 비율의 80%를 넘는 상황에서, 참으로 고집스럽게 ‘부산’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김 씨는 “나는 부산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출판을 시작했다. 건축부터 시작해서 미술 쪽 작품집도 계속 만들고 있다. 그런데 부산에서는 필진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라고 아쉬워했다. 이 씨는 “내가 사라져도 책은 계속 남아 있다. 부산 관련된 책을 내는 데 비온후 출판사의 의의가 있지 않을까 싶다. 부산과 도시에 관련된 책을 계속 내겠다”라고 말했다.
2018년 망미동으로 이사오면서 책방을 열며 함께 시작한 기획전시는 40회를 넘었다. 지금까지와 다른 작업에 도전할 때, 혹은 오래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는 작가들이 특히 선호하는 공간이 되었다. 책방에 오는 사람들이 전시까지 보니 더 좋다는 작가들도 있다. 지금은 사라진 대안공간 반디에서 7년 세월을 젊은 작가들과 함께한 인연은 <대안공간 반디를 기록하다 1,2,3>로 남았다. 비온후에서 발행했던 비정기 문화예술잡지 <비클립> 역시 작가들을 세상에 알리고 활용하게 만들 목적이었다.
책방은 비온후가 동네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만들었다. 여러 활동 중 현재 가장 큰 자랑은 ‘아침 책상’이라는 6년 된 독서 모임. 대부분 장사로 바쁜 망미동 주민들을 위해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 오전 8시 반부터 1시간 동안 독서 모임을 한다. 한 권의 책은 한 달간 공통 대화 주제가 되어서, 별로 할 이야기도 없던 동네 사람들을 친구로 만들었다. 독서 모임으로 친해지니 카페 사장님은 돼지국밥집 단골이 되고, 돼지국밥집 사장님도 커피는 꼭 그 카페에서만 마시게 된다. 이것이 바로 상부상조가 아닌가. 책방이 마을 사랑방 역할을 한 덕분에 망미동 골목이 사람 냄새가 나는 지역 공동체가 된 것이다.
이들이 처음 얼굴을 트게 된 계기는 ‘비온후 책방 영화제’였다. 비온후의 모든 책장에는 바퀴가 달렸다. 책장을 밀어서 치우고 스크린을 설치하면 책방은 순식간에 마을 영화관으로 변신한다. 코로나 이전에는 30명까지 모여서 영화를 봤다. 동네 사람이 돌아가며 영화를 추천하고, 그 이유와 저마다의 느낌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저절로 가까워지기 마련이다.
‘비온후’에는 영어로 ‘be on who’(누군가와 함께 한다)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비온후는 그동안 출판사를 크게 키울 기회도 있었고, 함께 하자는 제안도 들어왔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이들 부부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제일 좋다. 직업으로서 출판하고 책 디자인 일을 하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부산에서 책을 만들어도 디자인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라고 말했다. 글·사진=박종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