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할 타자’ 윌리엄스 한국전서 목숨 잃을 뻔

전쟁 75주년 참전 빅리거 재조명
10여 명 목숨 걸고 한국 수호 나서
조종사 네이버스 대공포 맞고 전사
빅스타 윌리엄스 불시착 탓 부상
후유증 시달리다 선수 생활 마감
최후 생존자 브라운 2021년 사망

남태우 기자 leo@busan.com 2025-06-25 18:04:49

한국전에 참전했던 제리 콜먼(오른쪽 사진 가운데)이 2011년 9월 22일 미국 워싱턴에서 군 복무로 국가에 봉사한 저명인사에게 주는 라이언세일러상을 받은 뒤 다른 수상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작은 사진은 한국전에 참전했다 목숨을 잃을 뻔했던 테드 윌리엄스 생전 모습. 미해군 제공·연합뉴스 한국전에 참전했던 제리 콜먼(오른쪽 사진 가운데)이 2011년 9월 22일 미국 워싱턴에서 군 복무로 국가에 봉사한 저명인사에게 주는 라이언세일러상을 받은 뒤 다른 수상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작은 사진은 한국전에 참전했다 목숨을 잃을 뻔했던 테드 윌리엄스 생전 모습. 미해군 제공·연합뉴스

25일은 한국전쟁 발발 75주년이었다. 수많은 미국 청년이 한국을 지키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는데, 놀랍게도 미프로야구 선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을 직접 경험한 미국 야구선수들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메이저리거 10여 명 참전

한국전쟁 기간 미프로야구 마이너리그 선수 500명 정도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메이저리그 선수는 100명 정도 징집됐는데 대부분 미국에서 훈련만 받았고 실제 참전한 선수는 10명 안팎이었다. 메이저리그 선수는 1명, 마이너리그 선수는 수십 명이 전사했다.

목숨을 잃은 메이저리그 선수는 로버트 네이버스라는 세인트루이스 선수였다. 그는 원래 조종사였는데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때 복무했다가 1952년 다시 징집돼 한국전에 참전했다. 그런데 야간 폭격에 나섰다가 대공포에 맞는 바람에 격추돼 숨졌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 조종사가 너무 많이 죽는 바람에 한국전쟁 때는 조종사가 부족했다고 한다. 조종사를 양성하는 데 수년이 걸리기 때문에 할 수 없이 2차 세계대전 참전자까지 다시 한국전쟁에 불러들인 것이었다.

■마지막 4할 타자의 부상

한국전쟁에 참전한 메이저리그 선수 중에는 베이브 루스와 맞먹을 정도였던 테드 윌리엄스가 있다. 그는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21년간 뛰었는데 통산타율 0.344, 2654안타, 홈런 521개, 1839타점을 기록한 대선수였다. 최우수선수상(MVP) 두 차례, 타격왕과 홈런왕·타점왕 을 각각 4차례나 차지했다. 1941년에는 4할 타율을 기록했는데 그 이후에는 아무도 4할 고지를 밟은 적이 없어 그를 ‘마지막 4할 타자’라고 부른다.

테드 윌리엄스는 1952년 1월 9일 현역병 소집 통보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42년 조종사로 복무하다 1946년 야구로 복귀했지만 다시 한국전에 징집된 것이었다. 당시 메이저리그 최고 스타였음에도 병역을 회피하지 않고 입대했다.

보스턴 구단은 펜웨이파크 구장에서 ‘잘 다녀오세요 테드 윌리엄스’라는 환송식을 열었다. 팬 2만 4000명이 이날 행사에 참가했다. 구단과 팬들이 준 선물이 대단한 것이었는데, 1년 연봉 8만 5000달러, 보스턴 시민 40만 명의 ‘무사 귀환’ 서명이 담긴 공책 그리고 팬들이 돈을 모아 산 캐딜락 승용차였다. 당시 8만 5000달러는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100만 달러, 그러니까 14억 원 정도다.

환송식 마지막 순간에는 모든 사람이 손을 잡고 ‘올드 랭 사인’을 불렀고 윌리엄스는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윌리엄스는 미국의 해군기지에서 비행훈련을 받고 이듬해인 1953년 2월 2일 한국 땅을 밟았다. 포항의 미군기지에 배속됐는데 참전한 지 2주 만인 2월 16일 해군 F9F 전투기를 몰고 처음 전투에 참전했다.

윌리엄스는 하마터면 첫 출격에서 죽을 뻔했다. 폭격기들이 평양 300m 상공에서 폭탄을 떨어뜨릴 때 전투기로 호위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그의 전투기가 북한군이 쏜 대공포에 맞고 말았다. 북한 지역이라서 낙하산으로 뛰어내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그는 추락하지 않고 전투기를 잘 몰아 남쪽에 불시착했다. 목숨은 건졌지만 심한 화상을 입는 바람에 병원에 한 달 이상 입원해야 했다.

윌리엄스는 이날 죽을 위기를 넘긴 이후에도 38번이나 더 전투에 참전했다. 그러다 전쟁이 끝나기 직전인 1953년 6월 초 폐렴 때문에 퇴역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부상 후유증 탓인지 참전 이전보다 기량이 현저히 떨어졌다. 매년 30개 이상 치던 홈런은 10개 이상씩 줄었고, 세 자릿수였던 타점도 두 자릿수로 줄었다. 그러다 마흔두 살이던 1960년 은퇴했다.

한국전쟁에서 다치지만 않았다면 3000안타, 2000타점은 물론이고, 베이브 루스의 홈런 714개를 넘었을 것이라면서 팬들은 많이 아쉬워했다.

■콜먼의 가슴 아픈 사연

윌리엄스 외에 한국전에 참전한 메이저리그 선수로는 뉴욕 양키스 내야수였던 제리 콜먼과 보비 브라운이 있었다. 둘 다 초대형 스타는 아니었지만 주전급이었고 월드시리즈에서 각각 4번, 5번 우승한 선수들이었다.

콜먼은 해병대 소속 조종사 중령이었는데 윌리엄스처럼 2차 세계대전에 이어 한국전쟁에도 2년간 참전했다. 윌리엄스가 대공포에 맞아 불시착할 때 무전기를 붙잡고 긴급하게 메이데이 메이데이를 계속 불렀을 때 콜을 받은 군인이 바로 콜먼이었다. 그가 곧바로 구조대를 보낸 덕분에 윌리엄스는 목숨을 건졌다.

콜먼과 관련해서는 슬픈 뒷이야기도 전한다. 그는 폭격에 나섰다가 동료 조종사가 추락해 숨지는 걸 직접 목격했다. 동료의 이름은 맥스 하퍼였고, 나이는 겨우 서른세 살이었다.

전쟁을 마치고 콜먼이 귀국하자 뉴욕 양키스 구단은 ‘제리 콜먼 데이’라는 환영행사를 열었다. 그런데 행사 다음날 아침 7시에 누가 콜먼에게 전화를 했다. 맥스 하퍼의 부인이었다. 부인은 콜먼에게 “아이가 5명인데 다들 아빠가 언제 오느냐고 물어봐요. 남편 소식이 끊긴 지 오래됐는데 혹시 살아있나요”라고 물었다.

이때까지도 맥스 하퍼의 부인은 남편 사망 소식을 몰랐던 것이다. 콜먼은 목이 메어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는 겨우 눈물을 삼키고 “부인, 죄송합니다. 저는 살아 돌아왔지만 맥스 하퍼는 죽었습니다. 제가 직접 목격했습니다”라고 전하며 오열했다.

보비 브라운은 당시 야구선수이면서 의대생이었다. 그래서 의무병으로 한국전에 2년 가까이 참전했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간 뒤에는 야구를 접고 의사가 됐다.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메이저리그 선수 중 마지막 생존자였고 2021년 세상을 떠났다.

이제 한국전에 참전한 메이저리그 선수 중에서 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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