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 | 2025-10-27 16:14:34
“일반 갤러리 초대여서 정말 좋죠. 이제까진 시청, 작은 백화점 등 정식 갤러리가 아닌 곳에 많이 초대받았고, 갤러리에 가더라도 그룹전이어서 주목받기 어려운데, 여긴 2인전이니까요. 자랑스러워요. 다른 전시보다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아요.”
지난 16일부터 부산 해운대구 스페이스 토핑(대표 오상현, 해운대해변로 292 그랜드 조선 부산 4층)에서 열고 있는 ‘감각, 기록자들’ 전시 초대 작가 윤진석(27)·황성제(26)의 어머니 신인섭·김금자 씨가 들려준 소감이다. 스페이스 토핑은 오케이앤피(OKNP)에서 운영하는 상업 화랑(세컨드 화랑)이고, 윤진석·황성제는 발달장애인, 더 정확하게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 작가이다. 토핑이 장애 예술인 전시를 연 것도 처음이다.
둘은 2019년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올해로 6년째를 맞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주)화승 코퍼레이션 소속 작가인 동시에 부산문화재단 온그루 입주 작가이다. 또한 한국자폐인사랑협회 부산지부 블루아트 회원이다. 국내외 단체전 100여 회, 아트페어 10여 회, 비엔날레 1회 전시 이력도 비슷하다.
윤진석은 ‘기억을 그리는 시계 작가’로, 황성제는 ‘행복한 로봇들의 창조주’로 유명하다. 윤진석은 오로지 시계, 황성제는 끊임없이 로봇만 그린다. 황성제가 지금까지 창작한 로봇은 1만여 개에 달한다. 전시 제목 ‘감각, 기록자들’은 작가 각자의 감각을 매개로 삶을 기록하고 예술로 재구성하는 두 작가의 태도를 담아내는 점에 착안했다. 특히 두 작가 전시의 서문을 쓴 안현정 미술평론가는 “‘장애’라는 말이나 작가를 ‘극복’의 이야기로 환원하려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며 “윤진석 작가는 자신의 내면을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게 구조화하고, 기억을 반복과 규칙 속에서 층층이 조직하고, 황성제 작가는 세상을 감각의 질서로 번역해 내는 창작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라고 평가했다.
신인섭 씨는 “어릴 때는 진석이가 왜 그렇게 시계에 집착하는지 잘 몰랐다”며 “사람들과 소통이 어려워서 시계의 반복적이고 일률적인 소리에 반응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진석의 그림을 보면 시계별로 장소와 시간이 다 다른 걸 알 수 있는데, 그때 그 순간의 감정을 기록하며 잘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고도 전했다.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보는 눈도 많이 넓어졌지만, 옛날 시계에 ‘집착’하는 건 여전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윤진석은 ‘시계 작가’가 된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보이는 것처럼, 색감은 조금 더 밝아지고, 돌과 같은 오브제 작업으로 자신만의 시계를 업그레이드해 나가는 중이다.
한국조형예술고 출신의 윤진석과 달리 황성제는 부산전자공고에 진학했다. 김금자 씨에 따르면 당시 부산전자공고 특수반이 아주 잘 돼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졸업 이후가 걱정이었다. “학령기 때 성제가 그림을 그렸지만, 저게 낙서이지 직업이 되겠나 싶었거든요. 졸업 후엔 보호작업장(장애인직업재활시설)에 가야지 생각하고 견학도 많이 다녔어요, 그런데 하루 종일 나사 조여주고 한 달에 5만 원을 받는 거예요. 그래도 갈 데가 없으면 저기라도 가야지 싶었는데, 기장장애인복지관의 발달장애 작가 육성 프로젝트 ‘씨앗(C-Art)’을 알게 된 겁니다.” 그렇게 황성제는 ‘로봇 작가’로 거듭나게 된다.
이번 전시가 성사된 것은 부산문화재단의 노력도 컸다. 재단 관계자가 “이번 프로젝트는 장애 예술인의 단순한 기획 전시를 넘어 치열한 미술시장 현장에서 실질적인 유통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밝힌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두 사람은 한 살 터울이지만, 엄마들은 동갑이다. 그래서 힘든 점을 공유하며 함께 성장하고 있다. “주변에서도 많이 부러워해요. 둘 다 작가 생활에 만족하고요. 예전보다 장애 예술가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해도 아직도 이해가 부족한 부분은 있어요. 예를 들면 지체장애 같은 경우엔 휠체어를 타고 오더라도 자기 의사표시는 직접 하니까요. 하지만 우리 친구들은 멀쩡히 걸어 와도 자기 할 말을 못 해요. 그래서 가끔은 다른 장애인은 다 본인이 하는데, 왜 발달장애인들은 유독 엄마들이 나서느냐고 안 좋은 시선으로 보기도 해요.”
11월 4~9일 부산 동구문화플랫폼에서 개최할 ‘LOOP OFF’윤진석 개인전 포스터. 작가 제공
사실은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두 작가에게 먼저 질문했다. “오늘 전시 시작하는데 기분이 어때요? 이전과 다른 점이 있을까요?” 그러자 두 작가는 “좋아요!”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인터뷰 내내 황 작가는 로봇 그림만 그렸고, 윤 작가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전시는 11월 2일까지 열린다. 윤 작가는 11월 4~9일 부산 동구문화플랫폼에서 ‘LOOP OFF’ 윤진석 개인전도 이어 간다. 이 전시에선 ‘손 글씨 일기장’과 대표작 ‘정물화 시리즈’를 선보인다.
한편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발달장애인은 인지나 의사소통의 제약으로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지적·자폐성 장애인을 말한다. 지난해 기준 등록장애인은 약 263만 명, 이 중 발달장애인은 28만 명으로 전체의 10%를 넘는다. 전체 장애인 수는 다소 줄었지만, 발달장애인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