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철 기자 cyc@busan.com | 2022-10-13 18:37:45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민중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다. 불평등과 가난으로 인해 누적된 민중의 불만이 행동으로 옮겨지면서 프랑스 대혁명의 서막을 연 것이다. 개혁을 열망한 시민혁명의 불길은 1794년 7월 28일까지 계속됐다. 이 과정에 프랑스는 군주제 폐지와 입헌 체제로의 전환, 공포정치와 대학살 등 큰 혼란을 겪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그 피비린내 나는 참상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론 자유와 평등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분수령이 되었다.
장편소설 〈7월 14일〉은 프랑스 대혁명의 서막인 바스티유 점령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집중한다. 그날 하룻 동안 프랑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한다. 특히 바스티유 점령의 현장에 있던 민중 개개인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그동안 프랑스 대혁명이 주요 인물 몇 명, 몇몇 핵심 사건과 키워드로 간추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서술 방식을 택한 것이다.
‘사태를 직면하려면 이름 없는 군중의 시각으로 봐야 한다. 그리고 글로 옮겨지지 않은 것을 이야기해야만 한다. 선술집, 떠돌이, 세상 밑바닥, 물건을 지칭하는 사투리, 구겨진 돈, 빵 부스러기까지 낱낱이 따져 봐야 한다. 바닥이 문득 입을 연다. 입이 없고 말을 잃은 숫자로 치환된 무수한 군중이 보인다.’
저자 에리크 뷔야르는 프랑스 혁명사에 희미하게 기록되거나 기록되지 않고 잊힌 민중을 내세워 바스티유 점령의 현장을 생생히 그려 낸다. 소설에서 이날의 혁명을 이끈 주인공들은 글을 모르는 사람, 땀과 먼지를 뒤집어쓰며 푼돈을 버는 노동자, 백수건달, 시골 사람, 죽은 형제의 얼굴을 확인하는 동생이다. 이름 없는 군중의 시각으로 볼 때 제대로 볼 수 있다고 강조하는 저자는 그의 신념에 걸맞게 프랑스 대혁명의 주역인 가난한 민중의 몸짓으로 그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재해석한다.
〈7월 14일〉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소수의 주인공에게 집중해 이야기의 긴장도를 높이는 전통적인 작법과 전혀 다른 형태를 취한다. 뷔야르는 이렇게 설명한다. “집필을 준비하던 중 아카이브에서 건져 낸 공식 문서에서 기나긴 이름의 목록과 통계를 발견했다. 바스티유를 습격한 900여 명의 이름, 그중 사망자 98명이 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는 기록에 몸짓과 목소리, 사는 곳과 취미, 스치는 생각을 불어넣어 살아 움직이게 한다. 예를 들어 바스티유에서 총을 맞고 쓰러진 금박공 사고는 허름한 다락방에 살았고, 자주 어울리는 술친구들이 있었으며, 저녁 무렵 아내와 창가에 서서 잡담하기를 좋아했다. 가로등 점등원이라는 직업을 가진 프랑수아는 강변 시장에서 싸게 구입한 바지를 입고 구두끈을 대충 묶고 다녔으며 산책을 즐기곤 했지만 바스티유에서 총을 맞고 쓰러졌다. 다른 한편에는 짤막한 기록으로조차 남지 못하고 잊힌 여성들이 있다. 여성들은 푸대접을 받았고 그들의 성은 사라졌으며 주소, 생일, 출생지는 흔적조차 없어졌다. 이 소설은 이런 민초들의 이야기를 되살려 소설 속에 담아낸다. 기록의 표면 아래서 생동하는 다양한 삶을 글로 되살려 그 서러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저자는 한 인터뷰에서 “역사가 통계와 목록을 남겼다면 문학은 지나간 행위에 생명을 불어넣고, 사건을 군중에게 되돌려 주며, 군중에게 얼굴을 부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그런 작업으로 탄생한 이야기 안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숫자나 문자가 아니라 우리 같은 사람들의 얼굴일 것이다.
뷔야르는 역사를 다시 쓰는 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과거와 현재를 부단히 연결 짓는다. 책의 마지막 두 문단에 이르면 지난날을 통해 오늘날의 현실을 환기하려는 뷔야르의 의도는 더없이 명확해진다. 그는 허름한 술집 테이블에 올라 연설하던 익명의 누군가처럼 우리를 향해 말한다.
“구역질이 날 때, 명령에 울분이 터질 때, 당혹감에 숨이 막힐 때면 일말의 연대감마저 끝내 썩어 문드러지고 만 저 가소로운 관저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 서류철을 훔치고, 문지기를 간지럽히고, 의자 다리를 물어뜯고, 옛 추억을 되살리듯 철통같은 벽 아래에서 빛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에리크 뷔야르는 1968년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는 자크 데리다 밑에서 철학과 인류학을 공부했다. 2차 세계대전 전야를 다룬 〈그날의 비밀〉로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받았다. 1999년 첫 책 〈사냥꾼〉을 출간했고 스페인 정복자들을 다룬 〈콩키스타도르〉, 1차 세계대전을 다룬 〈서쪽의 전투〉, 식민지와 노예제를 다룬 〈콩고〉, 서부 개척 시대를 다룬 〈대지의 슬픔〉, 종교 개혁 시대를 다룬 〈가난한 자들의 전쟁〉 등을 집필했다. 에리크 뷔야르 지음/이재룡 옮김/열린책들/216쪽/1만 4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