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돈 기자 happyi@busan.com | 2025-01-02 07:40:00
다사다난이라는 상투적 표현으로 퉁치고 넘기기엔 부족할 정도로 많은 사고와 난리가 났다. 답답하고 안타깝다는 생각을 넘어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도 많았다. ‘다이내믹 코리아’란 말도 2024년 대한민국 상황을 온전히 대변할 수 없을 것이다.
2024년 12월 대통령에 의해 난데없이 불거진 비상계엄은 국민의 일상을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더 테러 라이브’나 ‘서울의 봄’ 같은 영화를 보는 듯했던 상황은 앞선 그의 허물마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게 만들 정도였다. 2024년 마지막 일요일 발생한 여객기 참사는 대한민국을 깊은 슬픔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희생자들과 남은 가족에게 국민 모두가 마음 깊이 위로와 애도를 전하고 있다.
정국 혼란과 사회적 불안감이 이어지는 소용돌이 속에서 해가 바뀌었다. 밤새 일한 뒤 쉬지 못하고 다시 일터로 나선 것 같은 피곤함으로 맞는 새해다. 예년처럼 희망찬 새해를 맞자고 외치자니 어울리지 않는 옷을 걸친 기분까지 든다.
그래도 차분히 한 해를 되돌아보면 한 가지 빼놓으면 안 될 축복의 기억이 또렷하다. 바로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다. 10월의 깜짝 발표와 12월의 비상한 시국 속에서 진행된 시상식의 아이러니함이란. 어쨌든 예상치 못한(사실 경사와 흉사는 예고 없이 닥친다) 낭보에 ‘한강 보유국’이 된 대한민국은 잠시나마 문학 르네상스에 흠뻑 젖어 보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이후 진행된 전국 각지의 문학 행사에선 ‘한강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몇몇 대형 업체들이 온기를 거의 다 가져가긴 했지만, 얼어붙은 출판계에도 강한 훈풍이 몰아쳤다. 크리에이터가 희망 직업 1위라는 유튜브 만능 시대, 24시간 기계를 돌리는 진풍경이 펼쳐진 종이 인쇄소 르포 기사를 접하는 건 상상하지 못한 경험이었다.
개인 SNS도 온통 책 사진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집안 곳곳에 묵혀 뒀던 한강 작품이 소환되거나, 동네 책방에는 ‘○일 입고 예정’ 안내문이 등장하기도 했다. 온 국민이 문학평론가인 나라로 불려도 손색없을 것 같았다. 이런 현상을 불편하게 받아들인 몇몇은 ‘과시적 독서’나 ‘패션 독서’라 질타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록 한때의 허영일지라도 다시 기대하기 힘든 문학 열풍이 그저 반갑고 고마울 뿐이라는 문단이나 출판계의 간절함에도 크게 마음이 가닿았다.
이른바 책을 읽는 것이 멋있다는 ‘텍스트힙’의 절정기에 보수동책방골목을 찾았다. 가장 고전적인 활자 매체인 책과 가장 보편적인 SNS 수단인 사진이 한데 어울리는 현장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크리스마스이브였던 지난달 24일 오후, 책방골목은 의외로 인적이 드물었다. 인근 국제시장이나 광복로, 자갈치 일대가 그나마 연말과 성탄절을 즐기려는 사람들도 제법 북적이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1980년대까지 70여 곳이 성업하던 보수동책방골목은 현재 20여 곳으로 쪼그라들어 명맥을 이어 간다. 전국 유일 헌책방 거리라거나 부산시 미래유산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해마다 책방 수가 줄고 있다. 대청사거리에서 이어지는 책방골목 초입엔 공사장 가림막이 방문객을 맞았다. 서점 여러 곳을 매입해 오피스텔을 짓던 곳이다. 지금은 부동산 경기 악화 때문인지 공사가 중단된 채 방치돼 있다. ‘책방골목사진관’은 가림막이 끝나는 곳에 터를 잡고 있다.
외부에 전시된 사진 작품을 구경하고 있는 젊은 커플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니 정면에 헌책들이 빼곡히 들어찬 책장이 보였다. 책장 아래엔 여느 헌책방처럼 바닥부터 세로로 높다랗게 쌓아 올린 책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진관의 정체성을 한눈에 보여 주는 장면이다.
사진관은 장호림(40) 대표가 2018년 문을 열었다. 대학 졸업 후 서울에서 음반회사 일과 사진관 운영을 하던 장 대표가 어릴 적 오가던 고향 마을로 돌아와 시작한 곳이다. 사진관은 개업하자마자 방송에 등장하며 큰 주목을 받았다. 가수 유희열과 유시민 작가 등 ‘잡학박사’들이 전국 각지를 여행하며 지식을 나누는 인기 프로였다. 헌책방을 배경으로 찍은 흑백사진을 출력해 소장할 수 있는 특별한 사진관으로 소문나면서 전국에서 손님이 몰려들었다.
책방골목사진관은 헌책방과 사진관을 겸하고 있다. 당연히 장 대표도 책방골목번영회 회원이다. 장 대표가 처음 헌책방을 인수할 때는 판매용 책까지 몽땅 사들일 생각이 아니었다. 그저 일반적인 사진 스튜디오를 열 구상이었다. 그런데 책방골목이 사라지는 걸 안타까워한 옛 주인이 책방을 운영할 생각이 없다면 팔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렇게 책방과 사진관을 겸업하게 됐지만 다른 가게처럼 적극적으로 책 판매 영업을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기껏 하루 2~3권 거래하는 게 다반사인 다른 가게 사정을 잘 알기 때문이란다.
사진관은 예약제로 운영한다. 홈페이지(사진관 이름과 같다)에서 예약이 가능한 날짜와 시간을 확인해 전화 문자를 남기면 예약이 진행된다. 매주 일요일과 책방골목 전체 휴무일인 매달 1, 3주 화요일은 문을 닫는다. 예약 없이 방문했다가 헛걸음하는 이들도 제법 있다고 하니 명심하자.
종이 액자에 넣은 4×6인치 크기 사진 한 장 가격은 5000원. 사진 파일까지 포함된 가격이다. 1인당 최소 두 장은 구매해야 한다. 사진관 안에는 책장과 책을 배경으로, 혹은 책을 머리 위에 얹거나 펼쳐 드는 등 다양한 포즈의 흑백사진 샘플이 놓여 있다. 장 대표 자녀 셋과 아내가 모델이 되기도 했다.
애도 속에서 출발하는 2025년. 희망에 앞서 무탈과 안녕을 기원하게 된다. 아주 보통의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새해 아침, 부산의 역사가 숨 쉬는 곳에서 가족이나 연인 등 소중한 이들과 함께 차분히 흑백사진 추억을 남기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