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 2025-05-09 07:00:00
‘채식주의자’ 때문에 세 번 놀랐다. 첫 번째는 2007년 <채식주의자>가 출간되었을 무렵이었다. 한강 작가에게는 미안하지만 소설의 기괴함에 놀랐다. 시대를 앞서간 작품을 제대로 알아채지 못했던 것 같다. 두 번째는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때였다. 다들 놀랐겠지만 하필이면(?) 문학 담당 기자라 더 많이 놀랐다. 한국 작가가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받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는 올해 초 <사이언스>지에 실린 한 연구 발표를 보고 나서였다. 인류의 조상은 고기를 전혀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였다는 새로운 사실이 들어 있었다. 350만 년 전 남부 아프리카에 살았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7명의 치아를 질소 동위원소로 분석한 결과였다. 프랑스의 미식가 브리야 사바랭이 “당신이 어떤 음식을 먹는지 말하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주겠다”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원래 인류가 채식만 먹었다면 육식을 더 즐기게 된 오늘날의 우리는, 누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세계적인 채식 트렌드에 발맞춰 국내 채식 인구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한국채식연합에 따르면 국내 채식주의자 수는 2008년 15만 명에서 2018년 150만 명으로 10년 새 10배나 증가했다. 현재 채식 인구는 전체의 4% 수준인 25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10대와 20대 젊은 층 사이에서 채식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청소년기에 학교 급식을 통해 채식을 접할 기회가 늘어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채식이 트렌드가 된 이유는 크게 건강·동물보호·환경 등 세 가지가 꼽힌다. 채식이 육식보다 건강에 좋은지에 대해서는 의학적으로 논쟁이 많지만 동물과 환경 보호에 도움이 된다는 부분은 상당한 공감대가 이뤄져 있다.
지난 5일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서울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서 열린 ‘불살생(不殺生) 채식을 촉구하는 기자회견’도 그랬다. 한국채식연합·한국비건연대 등 5개 시민 단체는 공동 성명서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생명에 대한 이해와 존중 그리고 배려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부산 해운대 장산 중턱에 위치한 대원각사 주지 안도 스님은 2011년부터 전국에서 처음으로 동물 천도제를 연다. 부산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이기도 한 안도 스님은 “불교는 만물에 불성이 있다고 본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동물들의 존엄성도 느껴야 진정으로 자연을 사랑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가축이 배출하는 온실가스가 전 세계 배출량의 18%를 차지해 축산업이 세계 온실가스 배출의 주요 원인이라는 점도 잘 알려져 있다.
채식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채식만 하면 체력이 떨어진다는 속설도 그중 하나다, 과연 그럴까? 82세의 폴 매카트니는 지난 1월 첫 내한 공연을 열고 3시간 동안 공연을 이어가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는 체력의 비결로 채식을 꼽았는데, 알고 보니 1975년부터 무려 50년간 채식을 해 오고 있었다. 2024 시즌 KBO 역대 최고령으로 홀드왕에 오른 SSG 랜더스 투수 노경환은 2019년부터 몸 관리를 위해 채식을 한다. 체력 좋기로 소문난 테니스 선수 세레나와 비너스 윌리엄스 자매도 채식주의자다.
지난 2011년 KBS 2TV ‘해피선데이-남자의 자격’에는 75세의 ‘소녀 할머니’ 양송자 씨가 출연해 고운 피부와 목소리로 검색어 1위에 등극할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당시 양 씨는 “20년간 채식으로 악성 알레르기를 완치한 것은 물론이고 검은 머리가 나고, 눈이 좋아지고, 끊겼던 월경까지 다시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채식주의자들의 성지(聖地)로 꼽히는 부산의 비건 빵집 ‘꽃피는 4월 밀익는 5월’을 찾아가 최태석 셰프와 이야기를 나누다 3년 전에 세상을 떠난 양 씨가 그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청소년 서점 ‘인디고 서원’이 오랜 기간 공들여 채식 식당 에코토피아를 운영하는 이유도 알아보기로 했다.
부산에서는 2021년에 발품을 팔아 부산 지역 채식 식당을 꼼꼼하게 소개한 ‘부산 비건 지도’가 민간 차원에서 나올 정도로 채식에 대한 관심이 높다. 하지만 부산시 등 지자체 차원에서 채식 식당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게적인 정보 제공이나 로컬 채식 메뉴 개발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점이 아쉬운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