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경륜 기자 takk@busan.com | 2025-03-30 16:21:28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자 여당과 야권 일부에서 “대법원이 ‘파기자판’으로 직접 유죄를 확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진다. 이번 무죄 선고로 ‘조기 대선’ 출마에 탄력을 받은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를 부각하려는 움직임으로 풀이되지만, 법조계는 파기자판이 극히 이례적인 절차인 만큼 실제 적용 가능성은 작다고 보고 있다.
30일 정치권에 따르면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 김기현 의원 등 여권 의원들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대법원의 ‘파기자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판사 출신인 김 의원은 지난 28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대표의 판결에 대해 “억지스럽고 기괴한 논리로 대한민국 사법부의 위상을 추락시킨 이번 판결은 그 의도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며 “최종심인 대법원만이 이번 항소심의 법리적 오류를 시정할 수 있다. 대법원의 신속한 파기자판 판결을 요청한다”고 주장했다.
‘파기자판’은 대법원이 원심판결에 법률적 오류가 있다고 판단해 해당 판결을 파기한 후, 사건을 하급심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직접 최종 판결을 내리는 절차다. 일반적으로 대법원은 판결에 문제가 있을 경우 원심판결을 파기한 후 사건을 다시 하급심 법원으로 돌려보내는 ‘파기환송’을 한다. 하지만 현행 형사소송법은 소송기록과 1·2심 법원이 조사한 증거 등으로 판결하기 충분하다고 인정한 때에는 대법원이 직접 판결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또 다른 판사 출신인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도 대법원의 파기자판을 촉구했다. 나 의원은 “대법이 관행대로 파기환송으로 원심인 고법에 되돌려보낸다면 재판 기간이 더 지연될 것이다. 관행에 매몰된 소극적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당 법률자문위원장인 주진우 의원도 “판결문을 여러 번 읽어도 핵심 논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재명 봐주기’ 판결”이라며 “이 사건처럼 증거가 충분할 때는 파기자판도 할 수 있다. (대법원의) 조속한 판단을 강력히 요청한다”고 밝힌 바 있다. 야권에서도 ‘이재명 불가론’을 강하게 주장하는 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페이스북 글에서 이 대표의 2심 선고 결과에 대해 “혼란을 해소한 것이 아니라 심화시켰다”며 “대법원의 신속 정확한 정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 전 총리는 이 글에 “파기자판이 옳다”는 문구를 썼다가 삭제하기도 했다.
이들이 파기자판을 주장하는 것은 조기 대선 국면에서 이 대표를 견제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오는 6월 말쯤 조기 대선이 열린다고 가정할 때 그 전에 이 대표의 선거법 유죄를 확정할 수 있는 유일한 경우의 수가 파기자판이기 때문이다. 대법원이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파기환송 할 경우 하급심 판결에 다시 시간이 소요된다. 그 사이 이 대표가 당선될 경우 사실상 처벌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판단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대표의 공직선거법 사건에서 파기자판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대한민국 법원 사법연감(통계)에 따르면 2023년 기준 대법원 상고심 사건(2만 419명) 중에서 파기자판(15명) 사례는 0.073%에 불과하다. 파기자판은 명백한 증거와 법리적 오류가 있을 때만 예외적 절차로 활용되는 셈이다. 또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재판에서 파기자판 결정이 내려진 적이 거의 없었던 점 등을 고려하면 이 대표의 사건에 대한 파기자판 가능성은 사실상 희박하다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이 때문에 법조계에서는 이 대표 사건의 원심 판단에 문제가 있다면 파기자판보다는 파기환송이 이뤄질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다만 1심과 2심의 ‘정반대’ 결과에 대한 비판 여론과 함께 대법원의 신속한 판단에 대한 요구가 커지는 만큼, 대법원이 조기 대선 전에 최종심을 내릴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관측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