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유정 기자 honeybee@busan.com | 2025-03-31 09:47:49
“누구나 한계에 부딪힐 때가 있잖아요. 저 역시 그런 순간들이 셀 수 없이 많았어요.”
영화 ‘승부’로 돌아온 배우 이병헌의 말이다. 26일 개봉한 이 영화에서 이병헌은 한국 바둑계의 전설로 불리는 조훈현 국수로 변신해 관객을 만나고 있다. 부일영화상 부활 이후 남우주연상을 3번 받은 최초의 배우이자 충무로 대표 배우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병헌의 또 다른 얼굴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병헌은 “조 국수의 패배의 순간이 이 영화의 진짜 시작”이라고 말했다.
이 작품은 한국 바둑계 전설이자 사제 지간인 조훈현·이창호 국수의 바둑판 위 인생 이야기를 담는다. 한 지붕 아래 가족같이 지낸 두 사람의 모습과 바둑판 앞에선 서로를 이겨야 하는 숙명적 고뇌가 드라마틱하게 그려졌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2020년)에 이어 실존 인물을 연기한 이병헌은 이번엔 2대8 가르마, 치켜 올라간 눈썹, 검지와 중지로 턱을 괴고 다리를 떠는 습관 등 조훈현의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했다. 이병헌은 “역사적 인물을 연기하는 건 늘 부담스럽다”며 “조 국수를 만나 그의 성격과 심성, 버릇 등을 관찰했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 다큐멘터리와 사진에서 본 모습도 머릿속에 넣어두고 촬영 직전 또 한 번 본 뒤 그대로 하려고 했다”면서 “손의 모양과 위치, 눈빛과 행동, 버릇 같은 걸 탐구했고, 특히 자세를 유심히 봤다”고 설명했다.
그래서일까. 이병헌이 그린 조 국수는 관객을 당시 대국장으로 단숨에 끌어들인다. 흥미로운 건 이병헌이 이 작품을 만났을 때 ‘바둑 문외한’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영화가 바둑 자체보다 두 사람의 관계와 이들의 성장에 중점을 둔 만큼 캐릭터의 감정선을 잘 표현하려고 노력했단다. 이병헌은 “바둑돌을 제대로 잡아달라”고 부탁한 조훈현의 말에 따라 프로 바둑기사에게 교습을 받으며 자세를 익혔다. 그는 “집에 바둑판을 들여놓고 연습을 했다”며 “놓인 바둑돌을 건드리지 않은 채 거침없이 돌을 놓고, 능숙하게 상대 돌을 가져가는 걸 보여주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아들에게 오목을 가르친 뒤 함께 오목을 두며 (자세를) 연습했다”고 덧붙였다.
영화는 승승장구하던 조 국수가 제자인 이 국수에게 패배한 뒤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찬찬히 비춘다. 조훈현이 바닥을 치고 다시 일어선 것처럼, 이병헌도 그런 실패의 시간을 겪었다고 했다. 1990년대 TV 드라마에선 인기를 누렸지만, 영화에서는 데뷔작 ‘런어웨이’(1995년)를 비롯해 네 편 연속 흥행에 실패했을 때가 있었다고. 이병헌은 “‘국밥 배우’로 불렸던 때”라며 “신인이 영화 두세 번 망하면 캐스팅을 아예 안 하는 룰 같은 게 있었는데, 저는 네 편을 연속해 말아 먹고도 운 좋게 다섯 번째 영화에 캐스팅됐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개인적으론 4전 5기인데, 충무로 미스터리 중 하나로 꼽힌다”고 웃었다.
이후 이병헌은 영화 ‘내 마음의 풍금’(1999년)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은 뒤, ‘공동경비구역 JSA’(2000년), ‘번지점프를 하다’(2001년) 등을 잇따라 흥행시키며 충무로 연기파 배우로 자리잡았다. 자신을 ‘영화배우 이병헌’으로 소개하는 게 무척 기뻤다는 그는 TV 드라마,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시리즈보다 영화가 더 좋다고 했다. 이번 작품이 상대 배우인 유아인의 마약 혐의 사건 이후 개봉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엔 극장 관객을 만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이병헌은 “극장 특유의 냄새를 맡으면 지금도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며 “바둑도, 연기도 공식이 없는게 비슷한 점인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