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경륜 기자 takk@busan.com | 2025-04-08 17:16:10
지방자치권을 헌법상 기본권으로 명시하자며 ‘지방분권 개헌’을 강하게 주장해 왔던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최근 “논쟁만 불러올 수 있다”며 논의 유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과거 “지방분권엔 이견이 없다”고 강조했던 그가, 조기 대선 국면에서 개헌 논의가 본격화되자 갑작스럽게 한발 물러선 셈이다. 지방분권 개헌에 대한 그의 강한 의지가 정치적 셈법 앞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말바꾸기로 인해 과거 자신의 발언에 발목 잡혔던 조국 전 법무무장관을 일러 ‘조적조’(조국의 적은 과거의 조국)라고 칭했던 것처럼, 이 대표를 향한 ‘이적이’라는 비아냥마저 들리고 있다.
이 대표는 지난 7일 국회 최고위원회의에서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과 계엄 요건 강화는 국민투표법이 개정되면 곧바로 추진할 수 있다”고 밝혔다. 반면 대통령 4년 중임제, 감사원 국회 이관, 국무총리 추천제, 결선투표제, 자치분권 강화, 기본권 확대 등은 “논쟁의 여지가 크다”며 사실상 권력구조 개편 논의를 일축했다. 앞서 우원식 국회의장이 제안한 개헌 논의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힌 것이다. 이에 대해 민주당 김민석 최고위원은 8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권력구조 문제를 짧은 시간 안에 정리하긴 어렵다”며 “대선과 개헌 국민투표를 함께 추진하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덧붙였다. 이 대표만 개헌을 반대하고 있다는 비판이 커지자 이 대표의 입장을 변호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문제는 이 대표가 누구보다 지방분권 개헌의 당위성을 강조해 온 장본인이라는 점이다. 이 대표는 성남시장 시절이던 2017년부터 지방분권 개헌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해 왔다. 2017년 <월간중앙> 인터뷰에서 그는 연방제 수준의 헌법 개정이 현재와 같은 국회 구도에서 가능할까를 묻는 질문에 “현재의 국회가 지방 분권 개헌에 반대할 가능성은 작다고 본다. 지방의 권한을 강화하고 주민의 권리를 신장하자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고 자신 있게 답변했다. 당시 국회는 여소야대 구도였지만, 그는 지방분권 개헌이 정파를 초월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 봤다.
이 대표는 2022년 2월 ‘대한민국지방신문협의회’(대신협)와의 인터뷰에서도 “정치권에서 일부라도 개헌을 합의하면 여야 합의 가능한 사안부터 해결해 나갈 것”이라고 단언했다. 자치분권형 개헌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해 달라는 질문에는 “지금까지 전면 개헌만 생각해 왔는데 이제는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부분부터 개헌을 조금씩 해 나가는 방식으로 추진할 것”이라며 실용주의적 접근법을 제시했다.
특히 이 대표는 “지방자치권은 거주 이전의 자유, 신체의 자유처럼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돼야 한다. 지방정부의 자율권이 헌법에 명시되면, 위헌 판단을 통해 중앙정부가 자치권을 침해하지 못하게 된다”며 지방 분권 개헌의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대선 후보 당시에는 문재인 정부가 제안했던 자치분권 개헌을 이어받아 입법·재정·조직 등 3대 자치권을 헌법에 명시하겠다는 비전도 밝혔다. 하지만 이 대표는 최근 발언에서 자신이 오랫동안 강조해온 ‘자치분권 강화’마저도 ‘논쟁의 여지가 크다’는 이유로 개헌 논의에서 제외했다.
정치권에서는 이 대표의 태도 전환이 ‘시기상조론’보다는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으로 대선 정국의 주도권을 쥔 상황에서, 개헌이라는 이슈로 정국의 무게중심이 흔들리는 걸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권력구조 개편이 논의되면 대선 주도권을 놓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이 대표의 입장 선회를 이끌었다는 분석에 힘이 실린다.
당내에서도 반발 기류가 감지된다. 김부겸 전 국무총리는 “개헌과 내란 수습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개헌을 방관하는 태도는 안일하다”고 지적했다. 김동연 경기지사를 비롯한 비명계 대선주자들도 “대선과 동시에 개헌 국민투표를 하자”는 우 의장의 제안에 힘을 실으며 이 대표와 다른 입장을 분명히 했다. 민주당 안팎에선 최근 우 의장과 이 대표가 개헌을 주제로 만나 사전 교감을 나눴고, 이 대표가 당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이를 두고 우 의장이 최근 이 대표의 입장 변화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국민의힘은 이 대표의 입장 선회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이 대표는 2022년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국회 개헌특위 구성과 개헌 국민투표를 제안한 당사자”라며 “최근 정대철 헌정회장과의 통화에선 조기 대선 이전에 개헌을 하겠다고 했던 사람”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제 와서 개헌 논의가 본격화되자 말을 바꾸고, 친명계는 우 의장을 향해 막말까지 쏟아내고 있다”며 “이런 사람이 국가백년대계를 말할 자격이 있느냐”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