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보원 기자 bogiza@busan.com | 2025-09-22 16:46:41
“예술이 가진 순수함 때문에 예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순수함을 좇으며 살 수는 없는 시대가 됐습니다.”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에서 ‘헛된 춤’을 공개한 리홍치 감독은 예술도 하나의 상품이 된 현시대에 ‘순수예술’이 가능한지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리홍치는 대만·중국 출신의 감독 겸 배우다. ‘지구 최후의 밤’(2018년 칸 영화제 초청), ‘행복도시’(2018 토론토 국제 영화제 플랫폼상 수상) 등의 작품에 출연했다. 감독 데뷔작 ‘러브 이즈 어 건’이 지난 2023년 제80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미래의 사자상을 받으며 영화계의 신성으로 떠올랐다.
리 감독은 “지난 2018년 배우로서 부국제에 처음 방문했는데 올해는 감독으로 영화제를 찾아 감회가 새롭다”며 “음식도 맛있고 경치도 좋은 부산에서 시간을 보내는 건 배우로서도 감독으로서도 매우 보람찬 순간”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헛된 춤’은 상하이에 거주하는 예술가를 그린 작품이다. 리 감독은 “배우와 감독으로 생활하며 깨달은 점은 예술은 곧 생계라는 사실”이라며 “최근 사회경제적인 상황이 어려워짐에 따라 때로는 이해되지 않는 지시에도 따라야 하는 현실과 이상 사이 괴리를 몸소 느끼고 이를 작품에 담았다”고 밝혔다.
영화는 예술가라는 이상과 대도시 상하이의 집값이라는 현실 사이 괴리를 보여준다. 사촌과 함께 상하이에서 살 집을 구하러 다니는 주인공 몽키는 수중의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집이 얼마 없다는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예술을 위해서 이곳에 왔지만,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어떠냐는 말을 듣기도 한다. 결국 몽키는 처음 보았던 아주 낡은 원룸에 거처를 마련한다.
영화는 상하이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담아냈다. 리 감독은 “영화에 참여한 다수의 배우를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섭외했다”며 “영화에 참여한 이들은 현재 대부분 상하이를 떠났고 배경이 된 꽃집도 요리주점이 됐는데, 이러한 변화 자체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때로는 헛된 상하이라는 도시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영화를 통해 변화하는 상하이의 한 순간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작품은 과연 현시대에 순수예술이 가능한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자신의 예술을 추구하는 연출가와 돈을 지불하는 제작사 사이 갈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이 상품으로 전락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연출가는 내용이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제작사의 비판에 공연 내용을 수정한다.
상업적인 무대에서 돈을 주는 제작사의 말을 수용해야 한다는 건 어쩌면 고용인과 피고용인 사이 당연한 법칙이다. 그러나 그렇게 태어난 작품이 ‘내 것’이 아니라고 이질감을 느끼는 예술가의 심정 또한 당연하다.
예술이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 예술가들은 혼란에 빠진다. 순수예술에서 멀어지는 순간 누군가는 목숨을 끊는다. 무대와 의상을 꾸미는 주인공 몽키 역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반문한다.
그러나 리 감독은 자본 앞에서 무력해진 예술가들이 좌절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의 벽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조명한다. 리 감독은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마음속 짐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내려놓는다는 마음으로 춤을 춘다”며 “인생에선 바꿀 수 없는 일이 더 많고 현실을 마주했을 때 좌절하기보단 바람에 따라 춤추듯 흘려보내고 각자의 삶 속에서 예술의 가치를 찾자는 의미를 담았다”고 밝혔다.
현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에게 리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리 감독은 “배를 먼저 채우고 예술을 하라”며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자기 자신을 망치기 보다는 스스로가 처한 상황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예술 정신을 이어가라”는 말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