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경륜 기자 takk@busan.com | 2025-03-03 15:23:35
1993년 10월, 소말리아 모가디슈 상공. 미국 최고의 정예부대원들이 탄 군용 헬기 블랙 호크가 유탄 발사기를 맞고 추락한다. 헬기를 공격한 이들은 소말리아 민병대다. 전우를 구출하려는 미군과 헬기에 탄 미군을 확인사살하려는 민병대가 추락 지점을 향해 죽음의 레이스를 벌인다. 이른바 ‘블랙 호크 다운’이다. 2002년 개봉해 오늘날까지도 ‘웰메이드 전쟁 영화’로 손꼽히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랙 호크 다운’(2002)은 민병대의 위협으로부터 동료를 구하려는 미군의 사투를 그린 영화다.
하지만 현실 속 미군은 영화에서처럼 정의롭지만은 않다. ‘블랙 호크 다운’이 일어나기 전, 미군은 군벌 아이디드를 잡기 위해 도심 한복판에서 공습 작전을 벌인다. 학교와 민가에 총알 세례가 쏟아지고 이 과정에서 노인, 어린이, 여성들이 희생된다.
넷플릭스가 제공 중인 3부작 다큐멘터리 ‘블랙 호크 다운, 그 생존의 기록’은 1993년 소말리아 모가디슈에서 벌어진 전투를 다룬 작품이다. 미군의 시선에서 사건을 조명한 영화 ‘블랙 호크 다운’과는 달리 다큐에서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해 사건의 잔혹성을 보여준다. 영화와 달리 현실에서는 무자비한 악당도, 의롭기만 한 영웅도 없다.
다큐는 사건 당시의 아카이브 영상과 재연 영상,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사방에 피가 튀던 전쟁의 모습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전쟁 영화를 좋아하는 이른바 ‘밀덕’들도, 사람들이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소망하는 ‘비둘기’들도 모두 만족할만한 작품이다.
다큐를 보고 있으면 좋은 전쟁, 정의로운 전쟁은 없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미군 특수부대원과 소말리아 민병대는 모두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다. 이웃의 죽음에 분노한 소말리아 민병대는 미군의 헬기를 날려버렸고, 그 모습을 본 미군은 소말리아인들을 향해 다시 총구를 겨눈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폭력은 더 큰 폭력으로 이어진다.
신형철 작가는 저서 <인생의 역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5000명이 죽었다는 것을 5000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000건 일어났다가 맞다.” “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그 주변으로의 연결을 파괴하는 짓이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가. 누구도 단 한 사람만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살인은 언제나 연쇄살인이기 때문이다.”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에서도 우리는 희망을 본다. 작전 도중 한 건물 안에서 소말리아 민병대에게 포위당한 미군은 건물 안에 한 부부와 아이가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미군은 그들을 위협하는 대신, 총격으로 집이 파괴된 것에 대해 사과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그들을 안심시킨다. 당시 현장에 있던 미군은 “그곳에서 작은 인류애의 불꽃이 피어올랐다”고 회상한다. 인류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내야 할 것은 이 작은 인류애의 불꽃이다.
2022년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끝을 향해 달려가는 분위기다. 오랜 기간 이어진 전쟁으로 수십만 명의 생명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신영철 작가의 책에 따르면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수십만 번 일어난 셈이다. 이 세상에 결코 좋은 전쟁은 없다는 걸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