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주말] ‘대작’ 없는 이번 주…‘스파이 코드명 포춘’과 ‘한 남자’ 봤더니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2023-09-01 15:05:11

‘비싸도 너무 비싸다.’

최근 영화 티켓값을 결제하며 드는 생각입니다. ‘경건한 주말’ 리뷰는 ‘내돈내산’으로 합니다. 시사회 등을 통해 공짜로 영화를 보면 평가가 후해질 수 있습니다. 제값을 주고 영화를 보면 냉철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못 만든 영화를 보면 돈과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비판을 아끼지 않게 됩니다.

관객은 상승한 티켓값 때문에 아우성입니다. 주말 일반관에서 영화 한 편 보려면 1만 5000원을 내야 합니다. 소비자가 생각하는 적정 티켓값인 1만 원~1만 1000원과는 차이가 큽니다. 높아진 가격은 여러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극장 업계 1위인 CJ CGV는 지난달 30일 열린 ‘2023 CGV 영화산업 미디어 포럼’에서 관객이 확실한 재미가 보장된 작품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밝혔습니다. 고물가에 티켓값도 비싸졌으니 영화 한 편 관람하는 데에 신중해지는 건 당연합니다.

이런 경향은 개봉작 관람 시점에도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CGV에 따르면 2019년의 경우 신작을 관람하는 시점이 개봉 후 평균 10.8일이었지만, 최근 1년 사이에는 15.1일로 늘어났습니다. 개봉 후 충분히 입소문이 퍼진 뒤에야 실제로 관람하는 관객이 많다는 얘기입니다. ‘경건한 주말’도 예매하기 전 영화 후기를 살펴보려는 관객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아쉽게도 지난달 30일에는 이렇다 할 ‘대작’은 개봉하지 않았습니다. 개봉작 중 가이 리치 감독에 제이슨 스태덤이 주연을 맡은 ‘스파이 코드명 포춘’과 지난해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폐막작이었던 ‘한 남자’를 리뷰합니다.


영화 ‘스파이 코드명 포춘’과 ‘한 남자’. 제이앤씨미디어그룹·미디어캐슬 제공 영화 ‘스파이 코드명 포춘’과 ‘한 남자’. 제이앤씨미디어그룹·미디어캐슬 제공

가이 리치 작품 맞나…심심하고 밋밋한 ‘스파이 코드명 포춘’

미리 밝혀둡니다. 기자는 가이 리치 감독 작품들을 좋아합니다. 리치 감독 영화는 속칭 ‘때깔’이 좋습니다. 대중적으로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실사 영화인 ‘알라딘’(2019)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주연의 ‘셜록홈즈’ 시리즈로 유명하지만, 기자는 액션이나 판타지 장르에서 리치 감독만의 매력이 드러난다고 봅니다.

‘킹 아서: 제왕의 검’(2017)에서 보여준 화려한 시각효과와 촬영기법이 대표적입니다. 2021년 개봉한 제이슨 스태덤 주연의 ‘캐시트럭’에서도 박진감 넘치는 액션과 함께 특유의 스타일리시한 연출 능력을 뽐냈습니다. 묵직한 저음으로 음울한 분위기를 내뿜는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 역시 두 영화 모두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자에게는 ‘믿고 보는’ 가이 리치 감독이기에 지난달 30일 개봉한 신작 ‘스파이 코드명 포춘’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특히 리치 감독과 여러 번 호흡을 맞춘 ‘페르소나’(영화감독의 분신 역할을 하는 배우)이자 할리우드 대표 스타인 제이슨 스태덤이 주연이라 재미는 보장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영화 스토리와 설정은 익숙합니다. 무장한 괴한들이 우크라이나 오데사의 보안시설을 공격,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는 장비를 강탈합니다. 영국 정보당국은 전 세계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이 장비를 ‘핸들’이라 명명하고, 복잡한 정부 승인 없이 즉각 움직일 수 있는 비공식 팀을 꾸립니다. 도입부 설정만 놓고 보면, 정체 모를 위험물질인 ‘토끼발’을 찾는 ‘미션 임파서블 3’와 비슷합니다.

영화 제목인 ‘스파이 코드명 포춘’은 주인공인 올슨 포춘(제이슨 스태덤)을 가리킵니다. 포춘과 함께 사라 피델(오브리 플라자), J.J. 데이비스(벅지 말론)가 팀으로 움직입니다.

최정예 인력으로 구성된 포춘 팀은 핸들의 운반책을 공항에서 포착하고 그를 추적하려 하지만, 정보당국이 애용하던 또 다른 비공식 팀이 개입하면서 사건이 복잡해집니다.

영화는 포춘과 그의 라이벌인 ‘마이크’ 팀이 핸들을 두고 경쟁하는 구도로 진행됩니다. 영국 정보당국은 암거래 시장의 ‘큰 손’ 그렉 시먼즈(휴 그랜트)가 핸들 거래를 중개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올슨 팀은 그렉이 개최한 자선 행사가 열리는 초호화 유람선에 오릅니다. 그렉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스타 배우 대니 프란체스코(조시 하트넷)를 포섭했지만, 마이크의 팀원도 유람선에 잠복해있습니다.

영화 팬들이 ‘스파이 코드명 포춘’에 기대하는 건 제이슨 스태덤의 액션일 겁니다. 스태덤의 필모그래피는 액션 장르로 가득하니 당연합니다. 가이 리치와 호흡을 맞춘 ‘캐시트럭’에서도 휘몰아치는 액션이 감상 포인트였습니다.


영화 ‘스파이 코드명 포춘’.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제공 영화 ‘스파이 코드명 포춘’.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제공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번 작품에선 스태덤의 액션이 그리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맨몸 격투와 총격신이 있기는 하지만, ‘메카닉’ 시리즈 등 호평을 받았던 스태덤의 전작들과 비교하면 액션 비중이 아주 낮은 편입니다.

선발 출전이 기대되던 액션이 ‘노쇼’한 자리는 스태덤 특유의 유머가 차지했습니다. 포춘은 비싼 술과 휴가를 좋아하는 불만투성이 캐릭터인데, 연기자가 스태덤인 덕인지 밉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리치 감독의 재치가 돋보이는 코믹한 장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태덤이 가벼워진 만큼 장르가 애매해졌습니다. ‘메카닉’ 같은 하드코어 액션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드 로와 함께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액션 코미디물 ‘스파이’(2015)처럼 대놓고 웃기는 것도 아닙니다.

포춘과 그의 팀원들은 핸들을 찾기 위해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리치 감독도 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그런데 이렇다 할 긴장감이나 몰입감을 주는 상황 설정 없이 일이 술술 풀립니다. 서스펜스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사가 많고, 지루합니다.

올해 63세인 휴 그랜트의 캐릭터 변신은 성공적입니다. 주로 로맨스 영화에서 로맨틱한 신사 역할을 맡았던 휴 그랜트는 이번 작품에선 암거래로 막대한 부를 쌓은 빌런 ‘그렉’을 연기했습니다. 너그러운 인상으로 흑심을 숨기는 속물 연기에서 관록이 드러납니다. 다만 그렉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마냥 잔악무도한 악인으로 그려지지 않은 탓에 빌런으로서 존재감은 약해 보입니다.

포춘의 팀원 두 명은 각자 개성을 보여줬습니다. 전략가이자 해킹전문가인 ‘사라’를 연기한 오브리 플라자는 그렉을 속여 핸들을 찾는 작전을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로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행동대장 격인 ‘데이비스’를 맡은 벅지 말론은 분량은 작았지만 우직한 매력이 있고, 극중 유머 포인트에서도 활약합니다.

하지만 관객의 평가는 냉정합니다. 1일 현재 CGV 실관람객 만족도를 나타내는 ‘골든에그’ 지수는 71%에 머물러 있습니다. “매력포인트가 하나도 없는데 왜 매력포인트를 선택해야만 관람평을 남길 수 있느냐”는 하소연에 공감을 표합니다.


영화 ‘한 남자’. 미디어캐슬 제공 영화 ‘한 남자’. 미디어캐슬 제공

“나란 무엇인가”…정체성에 질문 던지는 ‘한 남자’

일본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문방구를 운영하는 리에(안도 사쿠라)는 젊은 나이에 어린 아들을 잃고 남편과 이혼했습니다. 리에는 어느 날 문방구 손님으로 다가온 순수 청년 다이스케(구보타 마사다카)와 사랑에 빠지고, 곧 재혼해 귀여운 딸을 낳습니다.

가장이 된 다이스케는 임업에 종사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집니다. 소박하지만 행복한 나날들은 그러나 오래가지 못합니다. 다이스케가 근무 중 사고로 숨지면서 리에는 다시 과부가 됩니다.

그런데 리에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장례를 치르던 중 다이스케의 형이 찾아와 건넨 말은 충격적입니다. 사진 속 다이스케가 자신의 동생이 아니라는 겁니다. 혼란에 빠진 리에는 전 남편과 이혼할 때 조정을 맡았던 변호사 키도(쓰마부키 사토시)에게 연락하고, 키도는 ‘가짜 다이스케’가 누구였는지 추적합니다.

2018년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한 히라노 게이치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한 남자’는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2019)의 이시카와 케이 감독이 연출을 맡았습니다. 제46회 일본아카데미상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포함한 8개 부문에서 수상했고, 지난해 열린 제27회 BIFF에서 폐막작으로 상영됐습니다.

지난달 30일 롯데시네마 독점으로 국내에 개봉한 ‘한 남자’는 단순한 범죄 추리물이 아닙니다. 재일 한인 3세인 키도가 다이스케의 인생을 파헤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품게 되는 이야기는 드라마 장르에 가깝습니다.

리에의 의뢰를 받고 조사에 나선 키도는 사망한 가짜 다이스케를 ‘X’라 지칭하고, 진짜 다이스케를 찾는데 몰두합니다. 그러나 다이스케의 지인들은 그를 보지 못한 지 오래됐다고 입을 모으고, 키도는 X가 다이스케를 살해한 뒤 그를 사칭해 살아온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키도는 살인자일지 모를 X의 삶도 들여다보는데, 외려 그 과정에서 X에게 점차 동화되는 듯합니다. 변호사라는 직업에 잘생긴 외모, 화목한 가정까지 갖춘 키도에게는 ‘한인 3세’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습니다. 일상에서 차별을 당하고, ‘조센징’이라는 모욕도 듣습니다. “재일 3세면 일본인이나 다름없다”는 장인어른의 말은 겉으로는 위로처럼 보이지만, 키도 입장에선 차별적으로 들립니다.


영화 ‘한 남자’. 미디어캐슬 제공 영화 ‘한 남자’. 미디어캐슬 제공

이런 키도의 삶은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했던 X의 인생과 닮아있습니다. X는 사실 아버지 때문에 사회적 낙인이 찍힌 인물입니다.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 X의 생애를 조사하면서, 키도는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방향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키도는 점점 다른 사람이 되어갑니다.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금지된 재현’(1937) 앞에 서 있는 키도의 모습은 상징적입니다. 이시카와 감독은 키도가 ‘금지된 재현’ 앞에 서 있는 ‘한 남자’의 포스터에 대해 “주인공인 키도가 거울을 보고 있는데, 자기 얼굴이 아니라 뒷모습만 보이는 상황”이라며 “‘나는 무엇이고 어디에 있나’라는 의문을 잘 나타내는 그림이라 생각해 그대로 활용하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한편, 일본에는 실제로 X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하쓰’(じょうはつ·증발)라 불리는 자발적 실종자들은 1990년대 초 일본 거품경제의 붕괴 이후 매년 수만 명 규모로 발생해 사회적 문제로 부상했습니다. 극중에는 또 혐한 시위대의 ‘헤이트 스피치(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차별·혐오 발언)’ 등 한국인 관객 입장에서도 관심이 갈 만한 일본 내 사회적 문제를 꼬집는 장면이 있습니다.

영화의 완성도는 높지만, 120분이 넘는 러닝타임은 다소 길게 느껴집니다. 군더더기를 걷어내고 좀 더 속도감 있게 편집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지난해 배우들과 함께 BIFF를 찾은 이시카와 케이 감독에게 기자는 ‘호흡을 길게 가져가면서 이야기를 천천히 전개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에 그는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속도감 있게 찍은 영화가 좋다고 생각하고, 나도 그렇게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면서도 “막상 촬영하다 보면 이런 속도로 찍게 된다. 어쩌면 각 배우들의 연기를 굉장히 좋아하다 보니 그걸 하나하나 보고 싶어서 천천히 가는 영화가 되지 않았나 싶다”고 답했습니다.

감독의 말대로 배우들은 호연을 펼쳤습니다. 주연을 맡은 쓰마부키 사토시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 등으로 국내에도 마니아 층이 있는 배우입니다. 쓰마부키는 ‘한 남자’에서 중후한 매력을 뽐내면서도 거칠게 흔들리는 내면 연기를 진중하게 풀어내 몰입을 도왔습니다. 그는 이 작품으로 일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조연인 안도 사쿠라와 구보타 마사타키도 최우수 조연상에 걸맞은 연기를 펼쳤습니다.

‘한 남자’는 동명의 원작 소설과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 충실합니다. 혐한을 조장하는 일본 내 우익을 비판해온 히라노 작가는 ‘한 남자’ 공개 후 언론 인터뷰에서 “펜으로 차별에 항의하는 싸움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는 “약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면, 소설과 문학은 존재 이유가 없다”고도 주장했습니다. 영화 관객도 키도의 시선과 X의 인생을 통해 사회적 낙인과 타자화의 폭력성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본의 아니게) 시의적절합니다. 1일은 일본에서 간토대지진이 발생한 지 100년이 되는 날입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헛소문으로 혐오가 극에 달했던 때, 6000여 명으로 추산되는 조선인이 오로지 정체성을 이유로 일본인들에게 살해됐습니다. 일본 교과서에도 실린 내용인데, 정작 일본 정부는 대학살을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도쿄신문은 이날 자국 정부를 향해 “부정적인 역사를 직시하지 않으면 비판을 부를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도쿄신문의 지적은 한국 정부와 군에게도 적용됩니다. 교과서에도 실린 ‘독립군’ 홍범도 장군에게 ‘공산주의 이력’이라는 낙인을 찍으려는 시도 역시 역사를 직시하지 않는 행태인 건 매한가지입니다. “홍범도가 공산주의자라는 것은 오해”라는 설명이 담긴 국방부 공식 유튜브 영상이 전날 SNS를 중심으로 확산되자, 하루 만인 이날 돌연 비공개 처리된 것은 그야말로 촌극입니다. 광복을 위해 평생을 바친 독립투사라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은 왜곡된 역사관이 휘두르는 폭력에도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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