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 2024-12-31 17:48:44
지난해는 모두가 한국 문학의 힘을 실감한 한 해였다. 노벨 문학상 수상 영향 때문인지 〈부산일보〉 신춘문예에도 각 분야에서 많은 작품이 쏟아졌고, 덕분에 결과도 알찼다. 6개 부문 당선자는 20대와 50대가 각 2명, 30대와 40대 각 1명으로 연령대별로도 고르게 나왔다. 엄격한 심사로 걸러진 문사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며 뭔가가 속에서 올라와 꿈틀대는 느낌이 들었다. 어려운 때일수록 써야 한다는 가슴속 울림 같은 것이었다. 문단의 신예 6명을 차례로 만난 이야기로 새해를 연다.
시 부문 당선자 이희수(57·경남 진주시 장재새미길) 씨는 당선을 알리는 전화를 받는 순간을 "뭔가가 파도처럼, 밀물처럼 막 몰려오는 것 같았다"라고 표현했다. 이 씨는 국어 교사로 명퇴한 202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 공부에 나섰다. 평생 국어 교사였지만 책을 볼 시간이 많이 없어, 지금 고전을 열심히 읽는 중이라고 했다. 시누이 부부 역시 시에 관심이 많아서 주말마다 모여 시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니, 가족의 격려도 큰 힘이 되어 보였다.
이 씨는 "시를 너무 멀리 보는 게 문제다. 자신에게 쌓인 것을 파고들면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올해 시 분야에 597명 2405편이라는 많은 작품이 쏟아진 까닭이 이해되었다. 이 씨는 "가능성이란 말이 이제 무게로 다가온다. 나를 타조알이라고 생각하고 뽑았는데 메추리알이면 어떡하지…"라고 새로운 걱정을 하고 있었다.
소설 당선자 조재윤(29·부산 북구 덕천로) 씨는 짧은 약력이 더 눈길을 끌었다. 신춘문예 투고 3년 만에, 부산일보에는 첫 응모로 덜컥 당선되어 깜짝 놀란 모습이었다. 고등학교 때 누나가 사 둔 신경숙 작가의 〈외딴방〉을 읽고 소설이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합평 모임을 2년간 해 오며 거의 대학교 문창과를 다닌 수준으로 공부가 많이 되었단다.
그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재미'다. 당선작 '기린을 옮기는 방법'은 상상 속에 있는 기린이 나오는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됐다. 그런데 조 씨의 글 쓰는 스타일이 기성세대와는 달랐다. 노래를 틀어 놓고, 카톡도 하고 인터넷도 보면서, 산만하게 글을 썼다. 사람들은 대개 처음 앉아서 쓰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그가 고안해 낸 방법이다. 놀면서 쓰자는 생각으로 글을 시작하면 결국 끝을 보게 된다니 그럴듯하다. 조 씨는 시대별로 동일하게 일어났던 사소한 사건들을 엮어 역사 소설을 써 보고 싶다는 큰 꿈을 털어놓았다.
시조 당선자 김동균(51·강원도 영월군 쌍용로) 씨는 당선 소식을 알리는 전화를 섭섭하게도 신종 보이스피싱 수법으로 의심했다. 김 씨는 음대를 나와 플루트를 연주하며 살던 음악가에서 시조시인으로 변신한 이색 경력의 소유자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보인다. 경기도 군포의 음악협회에서 사무국장을 했는데 뒤풀이에서 문인협회와 어울리다 그만 문학으로 넘어온 것이다. 그것도 서양 음악을 했으니까 한국적인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2019년부터 시조의 매력에 본격적으로 빠졌단다.
그가 생각하는 시조의 매력은 '자유로움 속에 있는 구속'이다. 소재 면에서 파격적인 '어느 모텔 수건의 공식'이 어떻게 나왔는지도 궁금했다. 이 작품은 지인이 운영하는 제주도의 리조트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착상이 떠올랐다고 했다. '휴지통'이나 '화살표' 같은 그의 작품을 보면 시조의 소재를 어디서 찾는지 짐작이 된다. 김 씨는 강원도에서 부인과 함께 편의점을 봐주고 있다고 했다. 편의점 관련한 시조가 쏟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산 출신의 동시 당선자 황세아(44·서울 동작구 만양로) 씨가 보낸 작품 봉투에 적힌 주소는 고시원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시원을 전전하며 산 게 15년 이상 되었다고 했다. 영화·드라마 보조 출연, 택배 상하차, 편의점, 막노동, 호프집, 놀이공원, 하객 알바, 시험지 보안 알바…. 닥치는 대로 일했다는 황 씨의 이력은 참으로 다채로웠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했던 일이 끝나면 빨리 집에 와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단다.
2020년 시로 등단한 뒤 이번에 동시로 다시 등단한 이유가 궁금해진다. 같은 해 당선된 동시를 읽다 재밌게 느껴지더니, 문득 자신도 동시가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동시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 무작정 다른 사람 작품을 읽고 해설집을 보는 식으로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2023년 부산일보 아동문학 최종심에 오르며 비로소 이렇게 쓰면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는 것. 하지만 동시는 어렵다. 열심히 써서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는데 자고 일어나서 다시 꺼내면 형편없어 보일 때가 너무 많다고 한숨을 쉰다. 그래도 작품을 들고 우체국으로 향할 때는 되게 신이 난다니….
희곡 당선자 윤주호(32·서울 종로구 평창길) 씨의 고향도 알고 보니 부산이었다. IMF 이후 동남은행에 다녔던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했다는 것이다. 윤 씨는 서울대를 졸업한 후에 SBS에서 예능 PD로 3년간 일하다가, 지금은 아버지 일을 도와주고 있다고 했다. 대학 때 연극반을 했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어떤 식으로든 연극을 계속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올해 한예종 극작과에 입학했다. 올해 신춘문예에 7편을 응모해서 부산일보 포함 2편이 당선되는 성과를 거뒀단다.
희곡을 한 번 써 보라는 이야기는 부인의 제안이라고 했다. 부인 역시 한예종의 서사창작과를 다닌다니 머지않아 부부 작가의 탄생을 목격할 수도 있어 보인다. 윤 씨는 "어릴 때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두 사람이 앉아서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이 발생하고 클라이맥스에 이를 수 있는, 그런 희곡을 쓰고 싶다"라고 말했다.
문학평론 이채원(25·경기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씨는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에 재학 중인 올해 최연소 당선자였다. 이 씨는 지금도 여전히 실감은 나지 않고, 아직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두려움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완벽히 준비된 상태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당선됐다고 인생이 바뀐다는 부담을 갖지 말고 계속 글을 써가며 더욱 발전해 나가는 에너지로 삼으라"라고 조언해 준 은사의 말을 전했다.
이 씨는 평론 외에 시도 쓰고 소설도 쓴다. 그는 "선후배나 친구들이 피드백과 함께 자신이 느낀 감정을 이야기해 줄 때 의도보다 많은 것을 발견하는 지점이 있다. 작가들이 무의식적으로 썼던 것을 알아내서 숨겨진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이 평론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지금보다 평론을 더 많이 공부해서 계속 더 좋은 작품을 내놓겠다고 다짐했다. 이들의 성장기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