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 2025-03-06 13:56:15
■신들의 섬을 걷는 문화인류학자/정정훈
오래 전 ‘신들의 섬’으로 불리는 발리에 다녀온 적이 있다. 발리는 인도네시아 다른 어느 지역보다 전 세계인에게 많이 알려진 관광지다. 발리를 배경으로 한 에세이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가 인기를 얻고,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영화도 큰 성공을 거두며 더 가보고 싶은 곳이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지나며 발리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가 가끔 궁금해졌다. “한번 발리에 오면 발리의 신들이 자꾸 부른다”는 말이 문득문득 생각났다. <신들의 섬을 걷는 문화인류학자>가 눈에 들어온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문화인류학자인 저자는 길었던 학생 시절 발리에서 여러 해를 거주하며 현지 조사를 했다. 강연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참석자들은 거의 다 부러운 얼굴이 된다. 그럴 때마다 그는 “발리에 해수욕 하러 간 게 아니다. 발리 농촌에서 살아 바닷가는 분기에 한 번쯤 갔다”라고 대꾸한다. 인류학자는 항상 어떤 지역의 무언가를 연구하는 사람이고, 그는 관광객과 주민의 상호 영향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수백 개의 종족으로 구성된 인도네시아에서 발리인을 구별하는 가장 큰 특징은 종교다. 인도네시아는 전체 인구의 87%가 이슬람 신자인데 반해 400만 명의 발리인은 발리 힌두교 신자다. 발리의 어원 역시 ‘제물을 바치다’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와리(wari)’에서 비롯됐다. 발리에는 힌두교 사원이 2만여 개나 있다.
무슬림이 아니기에 발리인은 돼지고기 요리를 사랑한다. 그중 가장 선호하는 음식이 바비굴링. 돼지를 뜻하는 ‘바비’와 굴린다는 의미인 ‘굴링’이 합쳐져 만들어졌다. 의례나 축제 때 먹던 새끼 돼지 요리였다가 시간이 지나며 점차 일상적으로 먹는 요리로 바뀌었단다. 100킬로그램에 가까운 돼지를 통째로 굴리는 모습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학생 부부로 발리에 있을 때 아이가 태어났단다. ‘조사 과정에서 얻는 학문적 즐거움이 아이가 주는 인생의 즐거움을 이길 수 없었다’는 저자의 독백이 당연하면서도 뭉클하게 느껴진다. 뜻밖에도 아이의 출생은 이들 가족이 발리에 정착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발리인은 결혼 후 아이를 낳아야 온전하고 문제없는 사람으로 간주하기 때문이었다. 의례 과정에서도 결혼한 남성과 결혼하지 않은 남성의 역할은 분명하게 갈린다. 결혼한 남성이 의례의 주체가 된다면, 결혼하지 않은 남성은 중·고등학생과 함께 의례의 주변부에 머무른다. “애들은 저리 가라!”는 의미인 듯하다.
역시나 우리와는 다른 발리 문화를 만나는 재미가 있다. 예를 들어 가업의 계승은 장남이 아니라 막내아들이 담당한다. 어찌 보면 가장 젊은 막내가 가업을 계승해 연로한 부모님을 부양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 같기도 하다. 발리인은 가족이 다 모여 함께 식사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대부분의 학교는 1교시가 아침 7시에 시작해 12시 이전에 끝난다니 부러운 사람도 꽤 있겠다.
발리 중남부에 있는 우붓은 ‘예술인의 마을’로 이름이 났다. 우붓에 오래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스스로를 ‘우붓디안’이라 부른다.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연주의 식생활과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발리 장기 거주 외국인의 첫 번째 유형은 요가와 자연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요가 수행자들이다. 이들은 길게는 일 년씩 우붓에 머물면서 요가를 수행한다. 두 번째는 은퇴 이민자다. 발리에는 1만 명의 호주 출신 은퇴 이민자가 거주한다. 세 번째는 발리 남성과 결혼한 일본 여성이다. 인구가 줄어서 걱정인 부산으로서는 주의 깊게 살펴볼 대목이 아닌가 싶다.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는 법이다. 관광객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환경 파괴, 수자원 고갈, 전통문화의 훼손을 동반했다. 하수도는 쓰레기로 가득 차고, 해안 역시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지하수는 오염되고 말라 갔다. 농부는 논을 헐값에 팔고 관광업 종사자가 되었고, 논은 수영장이 있는 빌라로 변모했다는 슬픈 이야기다. ‘그린 발리’로 대표되는 환경 담론이 공통 관심사로 떠올랐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예술의 향기가 물씬했던 고즈넉한 여행지의 흔적을 더 이상 찾기 힘들어졌음이 아쉬울 뿐이다. 인류학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학문이다. 정정훈 지음/사람in/304쪽/2만 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