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년 유럽 지배한 합스부르크 제국 짙은 향수 가득 [동유럽 미술관·박물관 기행]

② 오스트리아 빈

성벽 허문 공간에 만든 빈미술사박물관
아름다운 건축물 웅장함으로 관객 압도
5개 주제로 구성된 88개 전시실 늘 북적
‘에곤 실레’ 가득 레오폴트미술관도 흥미

오이겐 공작 건설 여름별궁 벨베데레궁전
모든 관람객 눈길은 클림트 ‘키스’에 집중
다비드, 고흐, 모네 등 대가 작품도 즐비

남태우 기자 leo@busan.com 2025-03-06 07:00:00

흔히 오스트리아는 음악의 나라라고 한다. 실제 세계적 명성을 누린 많은 음악인이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 반면 미술의 경우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정도를 제외하면 쉽게 기억할 만한 화가, 조각가를 찾기 어렵다. 그런데도 오스트리아 빈에는 둘러볼 만한 미술관이 한두 곳이 아니다. 20세기까지 유럽을 지배했던 합스부르크 제국이 유럽은 물론 전 세계에서 수집한 많은 미술품 덕분이다.

한 관람객이 빈미술사박물관에서 카라바지오의 16세기 작품 ‘가시관을 쓰는 예수’를 스마트폰에 담고 있다. 남태우 기자 한 관람객이 빈미술사박물관에서 카라바지오의 16세기 작품 ‘가시관을 쓰는 예수’를 스마트폰에 담고 있다. 남태우 기자

■빈미술사박물관

호텔에서 나와 트램을 타고 가다 부르크극장 앞 정류장에서 내린다. 트램이 달려온 도로는 꽤 넓은 데다 정비도 잘됐으며 상당히 고색창연해 보인다. 도로 이름은 링슈트라세다. 링은 ‘원형’이나 ‘반지’를, ‘슈트라세’는 거리를 뜻하는 단어이니 링슈트라세는 ‘원형 도로’라는 뜻이다. 도로가 빈 구시가지를 반지처럼 둥글게 에워싸고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19세기 말 성벽을 허문 자리에 건설된 빈미술사박물관과 마리아 테레지아 동상. 남태우 기자 19세기 말 성벽을 허문 자리에 건설된 빈미술사박물관과 마리아 테레지아 동상. 남태우 기자

링슈트라세 자리는 원래 빈 성벽과 해자 그리고 경사지가 있던 곳이었다. 19세기 중반 오스트리아제국 황제 프란츠 요제프가 날로 인구가 늘던 도시 권역을 확장하기 위해 성벽을 허물고 해자를 메워 얻은 땅에 만든 도로가 링슈트라세였다. 정부는 새로 생긴 땅 일부를 민간에 매각해 마련한 대금으로 기금을 조성해 공공 건축물을 지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공공 건축물은 오페라하우스, 부르크극장, 국회의사당 등이었다.

빈미술사박물관 관람객들이 다양한 표정으로 작품들을 둘러보고 있다. 남태우 기자 빈미술사박물관 관람객들이 다양한 표정으로 작품들을 둘러보고 있다. 남태우 기자

프란츠 요제프는 합스부르크 왕실이 오래 전부터 모아온 각종 유물, 미술품을 보관할 새 시설도 만들기로 했다. 미술품을 전시할 미술사박물관과 자연 수집품과 희귀품을 전시할 자연사박물관이었다. 당시 왕실에는 미술품은 물론 각종 희귀 물품과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동물, 식물, 광물 자료가 넘쳐났는데, 호프부르크궁전과 쇤브룬궁전, 벨베데레궁전 등 여러 곳에 나눠 보관 중이었다.

빈자연사박물관 공사가 먼저 마무리돼 1889년 8월 10일 개장식이 열렸다. 빈미술사박물관 개장식은 2년 뒤인 1891년 10월 17일 거행됐다. 이곳은 2개 층 88개 전시실로 이뤄졌다. 전시품은 고대 이집트, 청동기~중세 유물, 금 세공품 및 조각, 동전 그리고 미술에 이르기까지 크게 5개 주제로 구성된다.

구스타프 클림트 등이 그린 벽화와 천장화가 웅장한 빈미술사박물관 입구 계단 전경. 남태우 기자 구스타프 클림트 등이 그린 벽화와 천장화가 웅장한 빈미술사박물관 입구 계단 전경. 남태우 기자

큰 기대를 품고 들어간 미술사박물관은 무엇보다 아름다운 건축물의 웅장함으로 초장부터 관람객을 압도한다. 0층에서 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에워싼 구스타프 클림트, 한스 마라카트, 미하일리 뭉카시의 벽화와 천장화는 말문이 턱 막히게 만들 정도다.

빈미술사박물관 입구에서 오디오가이드 장비를 대여할 수도 있지만 포기하기로 했다. 어차피 설명을 들어봐야 이해하기 쉽지 않은 데다 미술품은 정형화된 틀 안에서보다는 상념 없이 가슴으로 보는 게 진정한 감상이라는 걸 여러 차례 미술관 기행에서 느꼈다.

이곳의 미술품 중에는 대작이 너무 많아 일일이 소개하기 힘들 정도다. 16세기 르네상스 화가 라파엘로가 그린 ‘초원의 마돈나’, 같은 시대 이탈리아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가 루돌프 2세 황제를 그렸다는 명작 ‘사계절’, 17세기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역작 ‘왕녀 마르게리타의 초상’ 등은 빼놓을 수 없다. 이 밖에도 루벤스, 렘브란트, 뒤러, 틴토레토 등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대가의 작품은 한두 개가 아니다.

노화가가 모작하는 모습을 관람객들이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남태우 기자 노화가가 모작하는 모습을 관람객들이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남태우 기자

박물관 내부를 둘러보던 도중 대가의 작품을 모작하는 노화가를 만났다. 남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열심히 그림을 베끼는 중이다. 그 모습이 흥미로운지 미술관을 둘러보던 사람들이 몰려 원작과 모작을 비교해보기도 한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데 이 노화가도 세상을 놀라게 할 창조적 작품을 내놓게 될까.


■레오폴트미술관

빈미술사박물관에서 나와 큰길 하나를 건너 5분만 걸으면 박물관 밀집구역인 뮤지엄 카르티에가 나타난다. 이곳에 2001년 개장한 레오폴트미술관이 있다. 이 미술관은 특징이 없는 직사각형 건물에 불과하지만 ‘빈에서 꼭 가야 할 미술관’에 넣은 것은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 20세기 초 표현주의의 거장 에곤 실레였다. 이곳은 전 세계 모든 미술관 중에서 에곤 실레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 그림, 사진, 자필 편지 등을 포함해 모두 200여 점이나 된다. 게다가 벨베데레궁전에서 볼 수 없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다른 명작도 즐길 수 있다.

에곤 실레 작품을 집중적으로 볼 수 있는 레오폴트미술관 전경. 남태우 기자 에곤 실레 작품을 집중적으로 볼 수 있는 레오폴트미술관 전경. 남태우 기자

레오폴트미술관에서 빼먹을 수 없는 에곤 실레의 작품은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 ‘줄무늬 셔츠를 입은 자화상’ 등 다양한 형태의 ‘자화상’과 그의 연인 발부르가 발리 노이질을 그린 ‘발리의 초상’이다. 여기에 당대에 그를 논란의 중심에 서게 할 정도로 여성 성기를 매우 자극적으로 드러낸 각종 누드화도 보인다. 그가 스물여덟 살에 단명하지 않았다면 어떤 위업을 남겼을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엄청난 대작들이다.

한 관람객이 레오폴트미술관에서 에곤 실레의 ‘변신’ 설명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남태우 기자 한 관람객이 레오폴트미술관에서 에곤 실레의 ‘변신’ 설명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남태우 기자

레오폴트미술관에는 ‘키스’ 외에 클림트의 다른 대표작인 ‘죽음과 삶’을 포함해 많은 그의 작품이 걸려 있다. 그가 살았던 방과 작업실을 재구성한 시설도 보인다.

레오폴트미술관 관람객들이 작품을 둘러보고 있다. 남태우 기자 레오폴트미술관 관람객들이 작품을 둘러보고 있다. 남태우 기자

■벨베데레궁전

빈에 갈 때마다 벨베데레궁전은 빼먹지 않았다. 필자를 포함해 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이 궁전에 가는 이유는 분명하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빈 분리파’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를 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잘 모르는 게 있다. 이곳에는 ‘키스’ 외에 빈센트 반 고흐, 클로드 모네 등 거장의 작품도 수두룩하다는 사실이다.

오페라하우스 앞에서 트램을 타고 10분 정도만 달리면 벨베데레궁전이 나타난다. 지금은 시내 한복판이나 마찬가지인 장소이지만 18세기 처음 건설될 때만 해도 사람이 잘 살지 않던 빈의 외곽이었다.

사보이의 오이겐 공작이 개인 여름별궁으로 지었던 벨베데레궁전 상궁 전경. 남태우 기자 사보이의 오이겐 공작이 개인 여름별궁으로 지었던 벨베데레궁전 상궁 전경. 남태우 기자

벨베데레궁전은 당시 오스트리아제국 최고 장군이었던 사보이의 오이겐 공작이 건설한 개인 여름별궁이었다. 이 궁전은 상궁과 하궁 그리고 두 궁전 사이 정원으로 나눠진다. 상궁은 각종 행사용으로, 하궁은 오이겐 공이 여름에 무더위를 피해 거주하는 별장으로 사용됐다.

오이겐 공작이 죽은 뒤 궁전을 매입한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는 상궁을 미술관으로 바꿨다. 클림트의 ‘키스’는 1908년 상궁에 자리를 잡았다. 이 작품은 오스트리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미술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빈에 가면 알 수 있지만 빈 관광을 먹여 살리는 기념품은 모차르트, 엘라자베트 황후 그리고 클림트의 ‘키스’다.

한 관람객이 태블릿PC로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를 촬영하고 있다. 남태우 기자 한 관람객이 태블릿PC로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를 촬영하고 있다. 남태우 기자

‘키스’는 두 연인이 입을 맞추는 장면을 담은 작품이다. 두 연인의 모습에서 진정한 사랑이 엿보이기도 하고, 진한 에로티시즘을 느낄 수도 있다. 보는 사람에 따라, 관람할 당시의 기분에 따라 작품에서 받는 감정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키스’ 앞에는 늘 관광객이 붐빈다. 사진을 찍으려고 사람들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린다. 시간대에 따라 줄이 길 수 있지만 때로는 서너 명만 대기할 때도 있다. ‘키스’를 배경으로 구도, 각도를 잘 맞추면 정말 그림 같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작품이 주인공인지, 내가 주인공인지 헷갈릴 정도다.

벨베레데궁전 관람객들이 다양한 작품을 둘러보고 있다. 남태우 기자 벨베레데궁전 관람객들이 다양한 작품을 둘러보고 있다. 남태우 기자

‘키스’ 앞에서 사진만 찍고 휙 돌아서면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작품을 감상해야 할 순서가 남았다. 그림은 가로 180cm, 세로 180cm로 꽤 커서 어지간히 뒤로 가도 제대로 볼 수 있다. 벽에 붙은 관능적인 그림 그리고 그 앞에서 즐거운 표정으로 셀카를 찍는 연인. 두 장면이 하나로 합쳐진 모습은 꽤 이색적인 느낌을 준다.

클림트의 그림은 ‘키스’뿐만이 아니다. ‘유딧 1’ ‘프리차 리들러’ ‘아담과 이브’ ‘궁전으로 가는 길’ ‘죽음을 앞둔 노인’ ‘아말리에 주커칸들’ ‘신부’ 등 무려 20여 점에 이른다.

‘키스’를 봤다면 이제는 천천히 미술관 다른 공간을 둘러볼 차례다. 꽤 넓은 데다 작품도 많기 때문에 하나하나 다 보려면 상당히 시간이 걸린다. 에곤 실레의 ‘웅크린 부부’와 ‘죽음과 소녀’ 등 20점,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빈센트 반 고흐의 ‘오베르 평원’과 ‘병 다섯 개’, 클로드 모네의 ‘요리사’와 ‘지베르니 정원의 길’, 르누아르의 ‘목욕 후’ 등 4점, 뭉크의 ‘해변의 두 남자’ 등 3점, 에밀 놀데의 ‘꿈을 말하는 요제프’ 등이다.

벨베데레 상궁에는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의 막내딸 마리아 안토니아, 즉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야기도 담겼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막내딸을 프랑스 왕세자와 결혼시키기로 약속한 뒤 파리로 보내기 며칠 전 환송 파티를 열었는데, 파티 장소가 벨베데레 상궁이었다. 당시 파티 참석자가 1만 3000여 명이었다니 이곳 말고는 큰 행사를 치를 공간을 찾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 대가의 화려한 작품을 관람하면서 호강하느라 온갖 색감으로 물든 눈이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걸 느끼며 상궁에서 나온다. 하루 종일 머무르고 싶지만 다음 일정을 생각하면 고집을 피울 수는 없다. 빈(오스트리아)/글·사진=남태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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