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무대에서 놀고 싶다”…겨울 바닷가 맨발로 걷는 ‘노배우’ [맨발에 산다] ⑥

[최고참 연극 배우 박찬영]

중2 때 첫 무대…대학생 때 본격 활동
부산시립극단 창단 멤버로 정년퇴직해
판사·국정원장…영화판에도 얼굴 알려

70대 접어들며 예전 같지 않다 위기감
지난해 9월 30일부터 광안리 맨발걷기
100일·200일 목표 묵묵히 ‘생명의 길’

김희돈 기자 happyi@busan.com 2025-02-20 07:40:00

지난 13일 137일째 바닷가 맨발걷기를 끝낸 박찬영 배우가 광안리의 한 커피숍에서 자신의 연극 인생과 맨발걷기에 대한 생각을 밝히고 있다. 김희돈 기자 지난 13일 137일째 바닷가 맨발걷기를 끝낸 박찬영 배우가 광안리의 한 커피숍에서 자신의 연극 인생과 맨발걷기에 대한 생각을 밝히고 있다. 김희돈 기자

체감온도 영하 10도 밑으로 내려간 맹추위가 지나고 봄이 오나 했더니 다시 영하권. 차가운 바닷바람까지 몰아친 날 이른 아침 광안리해수욕장에서 그를 만났다. 짙은 색 선글라스를 착용한 은발의 사자머리가 내뿜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민락회타운 쪽에서 신발을 벗고 남천삼익아파트 방향으로 걸으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137일째 아침마다 해수욕장을 맨발로 왕복한다는 그와 끝까지 동행하려던 생각을 중간에 접고 양말과 신발로 벌겋게 부어오른 맨발을 감쌌다. 끝까지 걸었다간 발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남달랐던 그의 기운은 단지 선글라스나 사자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부산 연극계 대부로 불리는 박찬영 배우가 지난 13일 부산 광안리해수욕장에서 137일째 맨발걷기를 하고 있다. 김희돈 기자 부산 연극계 대부로 불리는 박찬영 배우가 지난 13일 부산 광안리해수욕장에서 137일째 맨발걷기를 하고 있다. 김희돈 기자
지난 13일 오전 부산 광안리해수욕장에서 바닷가 맨발걷기를 하고 있는 연극 배우 박찬영. 지난해 9월 30일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바닷가를 걷고 있다. 김희돈 기자 지난 13일 오전 부산 광안리해수욕장에서 바닷가 맨발걷기를 하고 있는 연극 배우 박찬영. 지난해 9월 30일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바닷가를 걷고 있다. 김희돈 기자

∎‘무대의 맛’ 알아버린 까까머리 중학생

이한 감독이 연출하고 정우성이 주연한 ‘증인’(2019)의 재판장, 곽경택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장동건 주연의 ‘태풍’(2005)에서 국정원장. 눈썰미가 제법 있는 시네필이 아니라면 좀처럼 알아채기 힘들 수도 있는 박찬영(72) 배우가 오늘의 주인공이다. 조연이나 단역으로 간혹 스크린에 얼굴을 알린 그였지만, 연극판으로 무대를 옮기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 연극판의 씨앗을 뿌리고 여전히 대부로 자리하고 있는 박찬영의 첫 무대는 중학교 2학년 무렵 성당 청년들이 올린 성탄절 공연이었다. 컴컴한 객석 구석에서 연습을 구경하던 그는 우연히 예수의 생애를 다룬 극의 유다 역을 맡게 됐다. 공연이 끝난 후 신부님의 칭찬과 관객의 박수갈채를 접한 까까머리는 이때 제대로 ‘무대의 맛’을 알아버렸다.

고교 졸업 후 잠시 섬유업체에서 일하던 박찬영은 대학을 나와야 제대로 대접받는다는 걸 깨닫고 입시에 도전했다. 무대를 경험한 그였기에 배우가 되려는 생각으로 서울의 한 대학 신문방송학과에 지원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배우를 포기할 수 없어 3수를 준비할 때 한 선배의 얘기에 귀가 번쩍했다. “찬영아, 연극 배우고 싶으면 굳이 서울로 안 가도 돼.” 부산의 대학에도 연극서클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동아대에 진학해 운명처럼 극예술연구회 식구가 됐다.

정우성 주연의 영화 ‘증인’에 재판장으로 출연한 배우 박찬영. 영화 스틸컷 정우성 주연의 영화 ‘증인’에 재판장으로 출연한 배우 박찬영. 영화 스틸컷

연극무대를 얻은 그에게 전공인 경제학 강의실은 뒷전이었다. 서클 선배들이 주축이 된 ‘극단 현장’ 창단에 참여하는 등 그는 이미 연극인의 길을 걷고 있었다. 9년 만에 대학을 졸업한 그는 잠시 보험회사와 화장품회사에 다녔지만 얼마 못 가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면 회사원 시절은 결혼 승낙을 위한 ‘위장 취업’에 가까워 보였다.

결혼하고 대학을 졸업한 후엔 무대를 호령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내와 자녀(딸 둘)를 둔 가장으로서는 어깨를 제대로 펴지 못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다 ‘엄마만 고생시키는 비겁한 가장’이라는 중학생 딸의 타박을 듣고서야 부랴부랴 짐을 싸 들고 집을 나서 공사장을 전전하며 가장의 책무를 다하기도 했다.

그에게 다시 무대 복귀 기회가 온 것은 1998년 초 부산시립극단 창단이었다. IMF 구제금융을 받던 때라 인원을 절반으로 줄여 출발했지만 당당히 창단 멤버로 함께하게 됐다. 박찬영은 2011년 정년 퇴임 때까지 부산시립극단의 주축으로 활약하며 ‘세일즈맨의 죽음’ ‘리어왕’ ‘맹진사댁 경사’ 등 주요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부산시립극단 시절의 박찬영 배우. 박찬영은 시립극단 창단 멤버로 들어가 2011년 정년 퇴임했다. 부산일보DB 부산시립극단 시절의 박찬영 배우. 박찬영은 시립극단 창단 멤버로 들어가 2011년 정년 퇴임했다. 부산일보DB

∎소리 없이 닥친 위기…“무조건 걷자”

시립극단 퇴임 후 박찬영의 삶은 더욱 바빠졌다. 같이 일을 해보자는 민간 극단의 요청이 줄을 이었다. 시립극단 단원으로 무대에 서는 동안에도 그들과 끈을 놓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많게는 한 해에 10작품이나 무대에 올리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그의 무대가 점점 깊고 풍성해졌음은 물론이다. 부산은 물론 전국의 후배 연극인들과 유대도 깊어져 어느새 ‘한국 연극계의 어른’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무대 뒤로 사라진다는 칠십 줄에 박찬영은 한국연극협회의 K-시어터 어워드 공로상(2022)과 공연예술부문 부산시문화상(2023)을 수상하기도 했다.

박찬영의 배우 인생 50주년 기념 공연 '나는 미치지 않았다' 포스터. 그동안 맡았던 수많은 배역들이 보인다. 극단 바문사 제공 박찬영의 배우 인생 50주년 기념 공연 '나는 미치지 않았다' 포스터. 그동안 맡았던 수많은 배역들이 보인다. 극단 바문사 제공

나이를 잊고 앞으로만 달리던 그에게 ‘이상 징후’가 감지된 건 2년 전쯤부터다. 늘 그를 피해 가던 감기 몸살이 찾아오더니 덜컥 독감에도 걸려버렸다. 이후론 연습 중에도 틈틈이 눕거나 앉아 쉬어야 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아,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지 않았나. 박찬영은 지난해 무대에 올렸던 작품 ‘두 번째 시간’을 끝낸 다음 날인 9월 30일부터 무작정 광안리 해변으로 가 신발을 벗었다. 남편의 건강을 염려한 아내의 권유를 귓등으로 흘리던 그였지만, 더 이상 잔소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광안리는 민락동에 사는 그가 걸어서 당도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연극 '백조의 노래'에서 열연하는 박찬영. 극단 바문사 제공 연극 '백조의 노래'에서 열연하는 박찬영. 극단 바문사 제공

연극 인생 50주년 기념 공연까지 마쳤지만 그는 여전히 배역 욕심이 많다. 리어왕을 비롯해 굵직굵직한 배역을 섭렵한 그는 최근 치매 환자로 무대에 서는 일이 잦다고 한다. 그런 그가 불륜이라도 상관없다며 무대 위 황혼 로맨스를 꿈꾼다. 불룩 튀어나온 뱃살을 줄여야 할 확실한 이유도 생긴 셈이다. 박찬영은 당장 3월 19일 경남 거창군에서 열리는 제43회 경남연극제에 김해시 대표 극단 이루마의 ‘안녕이라 말하지 마’에 출연한다.

한겨울 바닷가에서도 멈출 줄 모르는 박찬영의 맨발걷기는 그냥 취미 삼아 하는 운동이 아니다. 배우로서 욕심과 젊은 후배들과 계속 무대에 서고 싶다는 희망이 담긴 생명의 길이다. 박찬영의 이런 마음을 잘 아는 후배들은 지난달 8일 ‘박찬영의 맨발걷기 100일 잔치’에 기꺼이 자리를 함께했다. “4월에 열릴 200일 잔치도 잊지 마!”

자신의 연극 인생 50주년을 기념해 무대에 올린 '나는 미치지 않았다' 공연을 앞두고 후배 연극인들과 자리를 함께한 박찬영. 극단 바문사 제공 자신의 연극 인생 50주년을 기념해 무대에 올린 '나는 미치지 않았다' 공연을 앞두고 후배 연극인들과 자리를 함께한 박찬영. 극단 바문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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