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에서 공산주의까지 미술에 담긴 '보헤미아 역사'

[동유럽 미술관·박물관 기행] ①체코 프라하

망명 여걸이 섬에 건립한 캄파박물관
평생 수집한 미술품 2000여 점 전시
100억 원에 매입 쿠프카 ‘성’ 대표작

카프카박물관, ‘변신’ 느낌의 이색시설
대가 인생·작품, 여행 한자리 다 모아
정원 조각 ‘오줌 싸는 사람들’도 눈길

국립미술관 본관 벨레트르즈니 궁전
사무실 같은 외관 달리 전시 수준 대단
종교미술품 가득 아네슈카수도원 특이

남태우 기자 leo@busan.com 2025-02-20 07:00:00

축구면 축구, 음식이면 음식, 예술이면 예술. 취향에 따라 특정한 주제를 가진 여행이 유행하는 시대다. 3년 전 ‘모차르트와 시씨’를 주제로 다녀왔던 체코 프라하, 오스트리아 빈,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미술관과 박물관’이라는 주제로 다시 다녀왔다. 세 차례에 걸쳐 보름간 여정을 소개한다.

한 관람객이 종교미술품이 가득한 체코 프라하 아네슈카수도원 미술관을 둘러보고 있다. 남태우 기자 한 관람객이 종교미술품이 가득한 체코 프라하 아네슈카수도원 미술관을 둘러보고 있다. 남태우 기자

체코 프라하를 네 번 방문했지만 미술관, 박물관을 제대로 둘러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번 여행에 큰 기대를 건 것은 이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체코 출신 세계적 화가는 한둘이 아니었다.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알퐁스 무하는 체코가 가장 사랑하는 국민화가이며 한국인에게는 낯설지만 21세기 체코 최고 화가로 손꼽히는 프란티섹 쿠프카도 있다.


■캄파박물관

블타바강에는 숲이 우거져 공원 역할을 하는 섬이 많다. 그중에서 캄파섬은 전망이 아름다워 가장 큰 사랑을 받는다. 일상에서 지친 심신을 어루만지는 데에 최적의 장소여서 봄~가을에는 많은 사람이 산책을 즐긴다. 책 한 권, 물 한 병만 들고 작은 공원에 드러누워 따뜻한 햇살을 즐기기도 한다.

이곳에 미술관이 하나 있다. 이름은 박물관이지만 실제 용도는 미술 전문시설인 캄파박물관이다. 프라하 시민들의 산책 장소로 인기 높은 곳에 미술관이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최선의 선택이었다.

체코 프라하 블타바강변 캄파섬에 자리를 잡은 캄파박물관 전경. 남태우 기자 체코 프라하 블타바강변 캄파섬에 자리를 잡은 캄파박물관 전경. 남태우 기자

캄파박물관은 공산정권 탄압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했던 마리 막달레나 프란티슈카 메다 소콜로바가 만든 시설이다. 그녀는 파리에서 우연히 만난 체코 출신 화가 프란티섹 쿠프카의 작품에 반해 엄청난 돈을 들여 많은 그림을 사들였다. 미술사를 공부한 그녀가 모은 미술품은 2000여 점이었는데, 그중 쿠프카 작품은 260여 점이었다.

1989년 벨벳혁명으로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 귀국한 메다는 캄파섬의 고택을 고쳐 쿠프카와 20세기 체코의 대표적 조각가 오토 구트코론트의 작품을 전시하는 전문 미술관으로 조성했다. 일부 공간은 기획 전시회나 행사를 개최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한 관람객이 체코 프라하 캄파박물관에서 쿠프카의 ‘성’ 등 대표작을 둘러보고 있다. 남태우 기자 한 관람객이 체코 프라하 캄파박물관에서 쿠프카의 ‘성’ 등 대표작을 둘러보고 있다. 남태우 기자

캄파박물관에서 반드시 둘러봐야 할 작품은 쿠프카의 추상화 ‘성’이다. 국제통화기금(IMF) 간부이던 남편을 따라 미국 워싱턴에 간 메다는 이 작품을 사려고 집을 팔기도 했다.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작품 가격은 무려 100억 원이었다.

캄파박물관 주변에도 흥미롭고 인상적인 조각상이 있다. 박물관 뒤편에 설치된 ‘아기들’은 21세기 체코 최고의 조각가로 손꼽히는 다빗 체르니가 제작한 작품이다. 강변에는 ‘프라하의 노란 펭귄들’이라는 귀엽고 이색적인 조각상이 보인다. 이탈리아의 ‘크래킹 아트 그룹’이라는 예술단체가 재활용한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품이다.

체코 프라하 캄파박물관 인근에 설치된 ‘프라하의 노란 펭귄들’. 남태우 기자 체코 프라하 캄파박물관 인근에 설치된 ‘프라하의 노란 펭귄들’. 남태우 기자

■카프카박물관

캄파박물관에서 프라하 최고 인기 여행 명소인 카를교 아래를 지나 북쪽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다른 박물관이 나타난다. 체코 역사상 최고의 소설가라는 평가를 받는 프란츠 카프카의 인생과 작품을 담은 ‘카프카박물관’이다. 그의 작품 ‘변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박물관은 꼭 들러야 한다.

카프카는 독일어로만 작품을 쓴 유대인이어서 당대 체코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결핵에 걸려 세상을 떠난 그는 죽을 때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모든 작품을 불태워 없애라고 유언했지만, 브로트는 친구 작품을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출간했다.

관광객들이 체코 프라하 카프카박물관과 다빗 체르니의 조각 작품을 둘러보고 있다. 남태우 기자 관광객들이 체코 프라하 카프카박물관과 다빗 체르니의 조각 작품을 둘러보고 있다. 남태우 기자

혜성처럼 등장한 카프카의 작품을 읽은 세계 각국의 문학 평론가와 독자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렇게 훌륭한 소설이 갑자기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전 세계를 강타한 열풍에도 그는 체코에서는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카프카 전집이 체코어로 완역된 게 불과 18년 전인 2007년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입증한다. 지금도 카프카는 체코에서 최고의 존경을 받는 작가가 아니라고 한다.

체코 프라하 카프카박물관에서 영상물이 상영되고 있다. 남태우 기자 체코 프라하 카프카박물관에서 영상물이 상영되고 있다. 남태우 기자

카프카박물관이 건립된 것은 1999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카프카 전시회의 성공과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의 이스라엘 방문 덕분이었다. 이후 말라 스트라나에 카프카박물관을, 유대인지구인 요제포프에 카프카기념물을 세우는 사업이 추진됐다.

카프카박물관은 카프카의 인생을 보여주는 자료를 전시하는 공간이다. 그의 개인사는 물론 인간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일기, 사진 그리고 박물관 건립 이전에 공개되지 않았던 그림을 전시한다. 유대인 혈통에서부터 지적 생활 그리고 여성관계와 여행 등 다양한 내용을 담았다.

어두운 분위기를 배경으로 체코 프라하 카프카박물관에 전시된 카프카의 작품과 연인들의 사진. 남태우 기자 어두운 분위기를 배경으로 체코 프라하 카프카박물관에 전시된 카프카의 작품과 연인들의 사진. 남태우 기자

이곳에서는 그의 대표작 ‘변신’에 담긴 신비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등골을 써늘하게 만드는 박물관의 어두운 분위기는 카프카의 마음 속 가장 깊숙한 곳에 잠재한 아픔과 고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관공서나 쇼핑센터처럼 보이는 체코 프라하의 국립미술관 본관 전경. 남태우 기자 관공서나 쇼핑센터처럼 보이는 체코 프라하의 국립미술관 본관 전경. 남태우 기자

■국립미술관

다른 나라 수도처럼 프라하에도 국립미술관이 있다. 특이한 점은 프라하의 국립미술관은 한 곳이 아니라 아홉 곳에 분산돼 있다는 사실이다. 그중 가장 크고 중요한 곳은 1920년대에 무역박람회 전시장으로 건설됐다 국립미술관 본관으로 개축된 벨레트르즈니궁전과 종교시설을 활용한 아네슈카수도원이다.

한 여성이 체코 프라하 국립미술관에서 공산정권 시절 작품 설명문을 읽고 있다. 남태우 기자 한 여성이 체코 프라하 국립미술관에서 공산정권 시절 작품 설명문을 읽고 있다. 남태우 기자

벨레트르즈니궁전은 전혀 미술관답지 않다. 외관은 마치 콘크리트로 대충 지은 관공서나 쇼핑센터처럼 보인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여기가 국립미술관 본관’이라는 말을 들으면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부 전시 작품 수준은 남다르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체코 근현대 및 공산정권 시절 작품까지 관람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곳이다.

이곳에는 알퐁스 무하, 바츨라프 홀라, 쿠프카, 바츨라프 미슐벡 등 체코 미술가들의 작품은 물론 1910년대 제1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 정부가 프랑스에서 대거 사들인 알브레흐트 뒤러,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폴 세잔, 파블로 피카소 등 다른 나라 작가의 작품 100여 점도 전시됐다.

체코 프라하 국립미술관 관람객들이 특별전을 둘러보고 있다. 남태우 기자 체코 프라하 국립미술관 관람객들이 특별전을 둘러보고 있다. 남태우 기자

벨레트르즈니궁전에서 트램을 타고 20여 분 달리다 공화국광장 인근에서 내린다. 굽이굽이 골목길을 따라 한참 헤맨 끝에 도착한 곳은 아네슈카수도원이다. 이곳은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되기 싫어 수녀가 된 12세기 보헤미아 국왕 오토카르 1세의 딸 아네슈카가 건설했고 사후에 묻힌 성소다.

11세기 아네슈카 공주가 건설했고 묻힌 체코 프라하 아네슈카 수도원 전경. 남태우 기자 11세기 아네슈카 공주가 건설했고 묻힌 체코 프라하 아네슈카 수도원 전경. 남태우 기자

20세기 들어 국립미술관 분관이 된 이곳에는 ‘1200~1550년 보헤미아 및 중부유럽 미술품’이 전시돼 있다. 당시는 종교가 가장 중요한 시대였던 데다 수도원이기 때문에 이곳 전시품은 대부분 기독교 관련 작품이다. 수많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그리고 성가족을 주제로 하는 작품이 어두운 수도원 미술관 내부를 가득 메우고 있다. 이곳을 한 바퀴 돌아보면 종교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의 가슴에도 깊은 신심이 생길지 모를 일이다.

종교 관련 작품이 대거 전시된 체코 프라하 아네슈카 수도원. 남태우 기자 종교 관련 작품이 대거 전시된 체코 프라하 아네슈카 수도원. 남태우 기자

카프카가 다닌 학교가 있었던 구시가지광장 킨스키궁전, 프라하성 앞 살모프궁전과 슈테른베르크궁전, 30년 전쟁 때 조국을 등지고 오스트리아 편을 들어 출세한 귀족이 만든 발트스타인궁전의 실내승마학교 등 다른 국립미술관 분관도 둘러보고 싶었지만 일정이 짧은 여행객에게는 언감생심이다. 프라하(체코)=남태우 기자 l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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