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유정 기자 honeybee@busan.com | 2025-09-24 16:39:25
홍콩 배우 량차오웨이(양조위)가 3년 만에 부산국제영화제(BIFF) 무대에 섰다. 올해 BIFF 아이콘 부문에 초청된 일디코 에네디 감독의 신작 ‘사일런트 프렌드’를 들고서다. 그는 에네디 감독과 함께 2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야외극장 오픈토크 무대에 올라 한국 관객과 만났다. 30회를 맞은 BIFF에서 세계적 거장과 배우가 한 무대에 오르자, 지나가던 시민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영화는 독일의 한 대학 식물원에 뿌리내린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나무 곁에 머문 세 시대의 인물들이 영화 속을 가로지른다. 1908년 식물학에 뛰어든 한 여학생과 1972년 식물 연구와 사랑을 동시에 키운 청년, 그리고 2020년 팬데믹 시기 홍콩 출신 신경과학자 토니 웡이 각각 등장한다. 서로 다른 시대와 공간의 인물들은 나무의 기억과 감각 속에서 교차하며, 인간과 식물의 관계를 성찰한다.
량차오웨이는 극 중 신경과학자 토니 웡으로 변신했다. 그는 이번 배역을 위해 철학서와 식물학 관련 서적을 여러권 탐독했다고 밝혔다. 5~6개월 동안 여러 대학교에서 식물과학자를 만났고, 식물학 서적을 연구하며 캐릭터를 빚어나갔다. 량차오웨이는 “이번 작품을 한 뒤 세상과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에 변화가 생겼다”고 했다. 그는 “예전에는 나무를 보면 그냥 하나의 배경처럼 생각했지만, 이제는 나무도 생명을 가진 존재라고 느낀다”며 “인간과 식물, 곤충 모두가 평등하다는 인식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식물들과 지구에서 어떻게 어울려야 하는지 많이 연구했다”며 “평소에 말이 많지 않아 내면을 눈빛으로 표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에네디 감독은 이 영화의 제목이 극 중 등장하는 은행나무를 상징하는 동시에 량차오웨이의 고요한 존재감을 드러낸다고 했다. 감독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역을 그의 침묵이 대신 전했다”며 “인간과 나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에 관한 작품인데 량차오웨이가 잘 표현해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영역의 너머의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것에 항상 관심이 많았는데 량차오웨이 배우의 고요한 침묵이 이 영화를 더 만들고 싶은 이유가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액션, 대사 같은 보통의 접근 방식에서 벗어나 배우 특유의 고요함으로 영화의 중요한 것들이 전달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오랜만에 부산을 찾은 량차오웨이는 설레는 마음을 드러내 눈길을 끌기도 했다. 그는 “3년 만에 부산에 왔는데 갈수록 아름다워지는 것 같다”며 “처음 부산에 온 게 1997년이었는데 (도시가) 갈수록 깔끔해지는 것 같다. 정말 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 같다”고 애정을 전했다. 량차오웨이는 “그동안 홍콩, 중국, 대만, 미국 영화로 한국 관객을 만났는데 이번엔 처음으로 유럽 영화로 여러분을 만나게 됐다”며 “이 작품을 한국 관객에게 선보일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관객석에선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질 때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오픈토크 현장은 영화의 주제처럼 고요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채워졌다. 마지막으로 감독은 ‘만약 나무와 대화한다면 어떤 말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잠깐의 평화를 느끼고 싶다. 나무는 인간보다 훨씬 관대하다”고 했고, 양조위는 “길에서 나무를 보면 말 대신 안아준다. 어떻게 이렇게 오래 살아왔을까 생각하며 마음으로 느낀다”고 답해 관객의 박수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