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우 기자 leo@busan.com | 2025-04-10 10:37:52
지난주에는 봄바람과 함께 봄비가 내렸다. 활짝 피었던 벚꽃은 봄비를 따라 서서히 지고 말았다. 꽃이 활짝 피었던 나뭇가지에는 이제 연록색 나뭇잎이 하나 둘 매달린다. 화사한 꽃비로 흩날리는 벚꽃을 뒤로 하고 경북 포항시로 달린다.
벚꽃 다음 차례는 유채꽃이 아니던가. 마침 포항시에는 유채꽃도 보고 봄 바다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일출명소인 데다 ‘상생의 손’으로 유명한 호미곶에 있는 ‘호미곶 유채단지’가 바로 그곳이다. 시원한 봄 바다와 상큼한 봄 유채꽃이 관람객을 흔쾌히 반기는 곳이다.
■호미반도 경관농업단지
자동차를 호미곶 해맞이광장 주차장에 세우고 유채단지로 향한다. 정식 명칭은 호미반도 경관농업단지다. 솔직히 주차장에서 약간 경사진 곳에 자리를 잡은 유채단지 풍경을 올려다 볼 때만 해도 적지 않게 실망했다. 잘못 온 게 아닌지, 다른 일정을 잡아야 할지 걱정할 정도였다.
마침 유채단지를 보고 내려온 한 중년 여성이 “바다가 보이는 유채꽃. 굳이 제주도에 갈 필요가 없네”라고 말한다. 믿어보자. 걱정은 호주머니에 집어넣든지, 멀리 바다에 던져버리기로 한다.
그 여성의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유채단지와 직접 올라가서 본 유채단지는 풍경, 분위기가 180도 달랐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을 이런 데 붙여도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행은 직접 가서 눈앞에 두고 봐야 결론을 알 수 있다.
호미곶 유채단지는 우선 면적부터 넓다. 15만여 평이라는데 그 넓은 평야를 유채꽃이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올해는 꽃 작황이 좋아 한꺼번에 개화했다. 덜 피고, 더 핀 게 없고 한꺼번에 화사한 꽃잎을 활짝 펼쳤다. 여기에 호미곶 유채단지는 경사지에 자리를 잡아 위에서 아래로 바라볼 때 풍경이 관람객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든다.
먼저 유채단지 가장 꼭대기 지접으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본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유채꽃 향기가 가득하다. 얼마나 향기로운지 깜짝 놀랄 정도다.
‘유채꽃 향기를 안 맡으면 봄의 보람이 없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따스한 봄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유채꽃 향기가 얼마나 강하고 아름다운지 노곤한 사람의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두 눈을 감고 잠시 향기를 감상하다 보니 그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는 걸 느끼게 된다.
단체관광을 온 것처럼 보이는 할머니들이 유채꽃을 먹던 옛날이야기를 나누며 감회에 젖는다. 옛날에는 유채로 김치, 나물을 해 먹었고, 기름도 짜먹었다는 등의 이야기다. 제주도에서는 유채를 지름 나물이라고 부른다. 기름의 사투리가 바로 ‘지름’이다. 카놀라유라는 기름이 있는데, 캐나다에서 품종 개량한 유채 기름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유채가 양기에 좋은 음식이라는 점이다. <동의보감>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유채를 오래 먹으면 양기가 왕성해져 음욕이 생긴다.’ 이 내용을 생각하면서 유채꽃 영어 이름을 살펴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레이프 플라워(rape flower)’다. 레이프의 뜻은 ‘성폭행’이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성폭행 꽃’이라는 건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 ‘rape’라는 이름은 ‘순무’를 뜻하는 라틴어 ‘rāpa’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오해하지 말기를.
호미곶 유채단지를 가로지르는 논두렁길에는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꽃을 보려는 관람객으로 가득하다. 저마다 표정과 모습은 다르지만 유채꽃 향기에 푹 빠져 헤어 나올 줄 모른다는 사실만은 똑같다.
꽃을 배경으로 다양한 모습을 찍는 사람, 그저 꽃향기에 취해 이리저리 걸어보는 사람, 꽃 사이에 놓인 의자에 앉아 황홀한 얼굴로 꽃에 취한 사람, 오랜만에 데이트를 하는 것인지 잔뜩 흥분한 채 휴대폰 사진을 찍는 중년부부.
호미곶 유채단지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위쪽에 다 올라가서 등을 반대로 돌리는 순간 나타난다. 바로 바다가 유채단지 아래에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푸른 바다와 노란 유채꽃.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도로와 집과 전신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자연과 각종 소품이 뜻밖의 ‘부조화스러운 조화’를 보이며 관람객으로 하여금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왼쪽을 보면 호미곶 해맞이광장과 새천년기념관은 물론 국립등대박물관 앞의 하얀 등대도 보인다. 다른 쪽에서는 출항을 기다리는 것인지, 입항을 기다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초대형 선박이 바다 깊숙이 뿌리를 박은 것처럼 고정돼 있다. 바닷바람에 시달린 탓인지 허약해 보이는 소나무 두 그루는 갑자기 찾아온 많은 관람객이 반가운지 가느다란 잎을 이리저리 흔들어 보인다.
■호미곶 해맞이광장
유채꽃 향기에 잔뜩 취한 채 바다 쪽으로 내려간다. 포항시까지 와서 유채꽃만 보고 가기는 아쉽다. 게다가 지금은 봄이 아닌가.
예상대로 호미곶 봄 바다는 싱싱하다. 며칠 전만 해도 심술을 부리던 봄추위는 온데간데없고 선선한 봄바람만 가득하다. 날씨가 좋아 하늘이 맑으니 사진 색깔도 좋다. 이런 날 사진을 찍으면 아무리 실력이 없어도 색감 하나는 최고일 수밖에 없다.
가장 인기 있는 ‘포토 존’은 역시 ‘상생의 손’이다. 예술성이 뛰어난지 판단할 수는 없지만, 바다를 중심으로 특이한 형태의 손 두 개가 놓여 있다는 사실만으로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바다에 뿌리를 내린 ‘상생의 손’을 배경으로 찍는 사진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여기까지 온 김에 화석박물관과 수석박물관이 있는 새천년기념관에 들어가 보기로 한다. 입장료가 3000원이라서 큰돈은 아니지만 아쉬움이 적지 않은 곳이다. 실망이 커서 이제 그냥 돌아갈까 하는 차에 등대박물관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혹시 저곳도 똑같은 것은 아닌지 걱정을 잔뜩 안고 먼저 기획전시관부터 들어간다. 우려와는 달리 등대박물관은 기대 이상으로 흥미로운 곳이다. 특히 어린 자녀를 동반한다면 이보다 더 재미있는 곳은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기획전시관 1층 로비에서는 바다를 똑바로 볼 수 있는데, 창 앞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찍는 사진은 기가 막힌 분위기를 연출한다. 등대를 안내하는 각종 장비는 물론 그림 그리기, 보물선 항해 대작전, 소리 확인하기 등 곳곳에 마련된 여러 체험 시설은 뜻밖에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