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경륜 기자 takk@busan.com | 2025-02-04 15:43:36
부산에서 활동 중인 애니메이션 감독 정유미는 ‘한국 최초’라는 타이틀을 여럿 보유한 인물이다. 2009년 단편 애니메이션 ‘먼지아이’로 칸 국제영화제 감독 주간에 초청된 데 이어, 2013년 ‘연애놀이’로 세계 4대 애니메이션 영화제 중 하나인 자그레브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한국인 최초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2023년에는 ‘파도’가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로 로카르노 영화제 단편경쟁 부문에 공식초청됐다. 지난해에는 ‘서클’(2024)이 베를린 국제영화제 단편 경쟁 부문에 초청되면서 ‘수학시험'(2010), ‘연애놀이’(2013), ‘존재의 집’(2022)에 이어 네 번째로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되는 기록을 세웠다.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베를린 영화제에 네 차례 이상 초청받은 한국 감독은 정유미 감독이 처음이다. 순수미술을 전공한 정 감독은 연필 한 자루로 세계의 이목을 사로잡는 연출자로 자리 잡았다.
정 감독은 지난해 10월 열린 부천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신작 ‘파라노이드 키드’를 공개했다. 정 감독이 2005년 발표한 그림책을 애니메이션으로 옮긴 작품으로, 배우 배두나가 나레이션을 맡아 화제가 됐다. 정 감독은 “20대 초반에 썼던 그림일기를 언젠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이제는 책에 담긴 감정을 하나로 묶을 수 있겠다고 생각해 작품을 만들게 됐다”며 “이번 작품에서는 처음으로 나레이션을 추가했는데 평소 배두나 배우의 목소리를 좋아해 제안했다. 배두나 배우가 연기내공이 있다 보니 요청하는 바를 성실히 표현해 줘 만족스러운 작업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정 감독은 대학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한 후 2004년 한국영화아카데미(KAFA)에 진학해 애니메이션 연출을 공부했다. 이후 서울에서 거주하며 작업 활동을 이어갔다. 2014년에는 그림책 <먼지아이>로 제51회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라가치상 뉴호라이즌 부문 대상을 받아 출판계에서도 주목받았다. 부산이 고향인 그는 KAFA 동기인 김기현 감독과 결혼한 후 2018년부터 부산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정 감독은 “서울에 꽤 오래 살았는데 서울은 항상 긴장감이 가득한 도시 느낌이라 답답한 구석이 있었다. 부산에 오면 공기와 날씨, 느끼는 압력에서 차이가 있었다”며 “20대 때는 압력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했는데, 지금은 압력보다는 스스로에게 집중하고 싶어 부산으로 내려오게 됐다”고 말했다.
정 감독은 연필을 사용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독창적인 스타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연필 작업의 매력을 ‘빈티지함’이라고 꼽았다. 정 감독은 “회화를 전공할 때는 연필 작업을 하지 않았는데 애니메이션을 시작하며 나만의 스타일을 찾게 됐다. 흑백의 단조로움이 주는 빈티지한 느낌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며 “지금은 흑백을 통해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것을 표현하는 게 재밌지만 표현하고 싶은 정서가 달라지면 연필이 아니라 다른 도구를 활용할 생각도 있다”고 언급했다.
부산에서의 작업 환경에 대한 솔직한 의견도 전했다. 그는 “부산의 경우 자연환경이 좋고 살기에도 좋아 독립적으로 작업하는 사람한테는 매우 훌륭한 환경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보와 인프라가 부족하다 보니 신인 예술가들에게 부산 거주를 추천하기에는 조심스럽다”며 “부산시가 예술가들에게 전시 공간을 포함한 여러 혜택을 제공하는 레지던시 사업 같은 것을 추진하는 등 과감한 지원책을 제시한다면 더 많은 창작자가 부산에서 지내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 감독은 지난해 공개된 ‘파라노이드 키드’에 이어 ‘안경’이라는 작품으로 관객과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안경’은 ‘김해김’(kimhekim)이라는 패션 브랜드와 협업한 단편 애니메이션이다. 정 감독은 두 작품의 영화제 출품·배급 작업을 진행하는 한편 새로운 작품의 시나리오와 기획 작업도 병행 중이다.
그는 “최근 몇 년 사이 문화예술 쪽으로는 지원 사업이 많이 줄고, 특히 독립영화와 지역영화의 예산이 거의 사라져 창작자들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창작자들이 힘을 냈으면 좋겠고 축소된 지원 제도도 회복됐으면 좋겠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