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보이는 날이 있었다. 지금은 그저 내 몸뚱어리 하나 간수하기도 힘들지만, 주변의 모든 것이 영화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영화학도 시절 눈길이 머무는 곳에 어떤 좋은 느낌이 생길 때면 난 "오늘은 영화가 보인다"고 말하곤 했다. 바깥에서 뛰어놀기만 하던 철없던 시선을 한순간 영화로 보게끔 만들어준 책이 있어 소개해 볼까 한다.
데뷔 후 40년간 딱 13편의 영화를 남긴 영화감독 로베르 브레송(1999년 사망)의 잠언과 같은 메모를 모은 책인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은 내가 지금까지 가장 많이 구입한 책이기도 하다. 물론 어떤 책을 해어질 때까지 읽어 새로 산 경우도 없고, 분량이 적어 책값이 싼 이유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이 책을 영화 창작의 바이블처럼 항상 지니고 다니며 후배들을 만나면 일독을 권하며 가방에 있던 책을 스스럼없이 준 적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브레송은 책에서 시네마토그래프와 시네마, 그리고 배우와 무표정한 모델을 구분한다. 그에게 시네마는 연극의 수단과 영화의 재생 기술을 이용한 눈요깃거리였고, 고집스럽게 사용한 단어인 시네마토그래프는 영화만이 가진 본성을 탐구하는 예술이었다. 그래서인지 브레송의 영화를 보면 과장된 표현의 전문 배우 연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모델이라고 지칭한 비전문 배우를 고용하여 밋밋한 표정을 보여 준다. 배우의 연기를 따라가는 영화가 아닌 영화 전체를 느끼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에게 있어 타성에 젖은 배우보다는 차라리 무생물들이 스크린에 접근하기 용이하여 영화 내면과의 관계 맺음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책을 읽는 내내 유사성보다는 차이를, 음악보다는 소음을 찾아 인상과 감각을 전달하기를 갈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르 클레지오의 서문 일부를 통해 브레송의 영화에 대한 태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어들은 치열한 실험을 거듭하는 한 영화감독의 일기장 속 메모들 그 이상이다. 이 단어들은 상처투성이다. 고통의 표시들, 보석들이다. 우리의 밤 속에서(스크린에 불이 들어오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와야 하는 창조의 밤) 이 단어들은 별처럼 빛난다."
이 책을 통해 영화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의 심오하고 독특한 구성의 영화가 지금의 관객들에게 사랑 받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고전적 문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을 발현시키기 위한 지침서로는, 꼭 영화만이 아닌 영역에서도 탐독할 만한 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브레송의 말대로 "꾸밈이 없는 현실은 모두에게 진실로 통한다." 오랜만에 영화가 보이는 날이다.
이연승 영화감독
학교에서 철학과 영화를 전공하고 이런저런 이상한 영화를 만들다가 우연히 공연 예술에 취미를 붙여 지금은 거리예술 기획자, 무대감독, 프로덕션 매니저로 활동 하고 있다. 최근 '고삐풀린 영화사'를 설립하고 다시 이상한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