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아닌 무속 전성시대를 무탈하게 넘기는 법

■ 중년의 샤머니즘 / 유명옥

무속 중독 시 사회적 고립
흑백논리·운명론에 빠트려
유학파 무당 자전적 에세이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2025-02-06 13:40:47

유학파 무당으로 <중년의 샤머니즘>을 쓴 유명옥 씨가 솟을 굿을 하고 있다. 유명옥 제공 유학파 무당으로 <중년의 샤머니즘>을 쓴 유명옥 씨가 솟을 굿을 하고 있다. 유명옥 제공

어쩌다 무속 관련한 책을 집어 들었을까. 다 내 잘못이지만, 세상 탓부터 하게 된다. 손바닥에 왕(王)자를 썼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건진법사, 무정 스님, 천공, 명태균 등이 줄줄이 이어졌다. 아침 드라마가 아니라 국회에서 ‘비단 아씨’까지 만났다. 어쩌면 우린 지금 철 지난 무인 시대도 아닌, 태고적부터 존재했던 ‘무속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중년의 샤머니즘>은 저자의 색다른 이력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유명옥 씨는 국가무형문화재 김금화 선생으로부터 신내림굿을 받았고, 중년의 나이에 독일 함부르크 조형예술대학과 스위스 칼융연구원에 유학해 비주얼 커뮤니케이션과 영성심리학을 연구한 유학파 무당이다. 이 책은 샤머니즘 관련한 자전적 에세이라고 봐야 하겠다. 목차 중에는 ‘테크노 시대가 가면 샤머니즘 시대가 도래한다’는 부분이 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아주 용한 예언이라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 책에 따르면 조선 시대에도 일부 무당이 주술과 비방(祕方)을 활용해 배후에서 권력을 행사했다. 무당은 천민이지만 양반가의 첩으로 들어가 당시 권력층과 결탁한 브로커로서 정치 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영조 21년에 발각된 독갑방(獨甲房)이라는 요사스러운 무당의 매흉(埋凶) 사건이 대표적이다.

독갑방은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사도세자를 저주했다. 그가 사용한 ‘고독’(蠱毒)이라는 주술을 쓰는 법이다. 뱀, 지네, 전갈, 독거미, 독나방, 독개구리, 독벌, 불개미, 그리마, 두꺼비 같은 맹독성 동물을 한 항아리에 가득 넣고 뚜껑을 닫는다. 그 안에서 서로 먹고 먹히는 아비규환이 벌어진다. 마침내 모두 죽고 최후의 한 마리만 살아남으면 ‘충귀’(蟲鬼)가 된다. 이 벌레의 독을 모아 가루로 빻은 후에 음식물에 섞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어떤 욕망이 이런 주술을 낳았는지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신기하게도 굿을 청하는 사람도 굿을 주재하는 사람도 거의 다 여성이다. 한국처럼 보수적인 유교 사회가 어떻게 굿판에서는 여성들이 전면에 나서도록 허용했을까. 저자는 30년 넘게 한국의 샤머니즘을 연구하고, 2016년 <무당, 여성, 신령들>을 출간한 로렐 켄달의 견해를 소개한다. 그녀는 한국의 무당 대부분이 여성이거나 여성의 복장을 한 남성(박수)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고, 한국의 샤머니즘을 여성의 종교로 규정했다.

켄달은 특히 IMF 위기를 겪은 샤머니즘이 자본주의 안에서 어떻게 적응해 나가는가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그녀는 굿을 의뢰하는 사람의 80% 이상이 중소기업 사업자 또는 자영업자라는 사실이 시장의 예측 불가능성과 불확실성을 반영한다고 봤다. 오늘날 한국의 무당은 불안정하고 예측 불가능한 자본시장에 위안을 제공하고 있다. 한국의 샤머니즘은 자본주의에 민첩하게 적응하고 생존했다는 것이다. 올 상반기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로 온다는 그녀의 다음 저서가 기대된다. 어쩌면 ‘무속과 한국 정치’가 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저자는 상담을 하다 보면 마치 쇼핑하듯이 새로운 무당이나 용하다는 점술가를 미친 듯이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고 고백한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한 영적인 활동으로 생각해 이미 중독이 되었어도 잘 모른다. 샤머니즘 중독자들은 흑백논리와 관계사고(關係思考)라는 관점을 가진다. 선과 악에 대한 극단적이고 이분법적인 흑백논리를 가지고, 원하는 것을 채워 주지 않으면 쉽게 분노하고 순식간에 공격적인 태도로 돌변한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과 인간관계를 맺는 사람들을 대할 때는 운명론을 바탕으로 판단한다. 서로 무관한 사건이나 사소한 우연의 일치를 경험해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운명적인 경험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스스로는 영적인 감응력이 높다고 생각한다. 겉으로 친절하고 다정한 무당을 맹신하고 깊이 몰입한다.

샤머니즘에 몰입하면 사회적으로 심각한 고립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무속에 깊게 중독되어 세상을 어지럽힌 한 부부가 생각난다. 중독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법이다. 히틀러 또한 점술을 좋아해서 전속 점성가를 다섯 명이나 옆에 두었다고 한다. 독재자의 최후를 꼭 점을 쳐 봐야 알까. K컬처의 나라 한국 정치, 언제쯤 국민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을지 그것이 알고 싶다. 유명옥 지음/새로운사람/576쪽/4만 9000원.


<중년의 샤머니즘> 표지. <중년의 샤머니즘>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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